[추억의 LP여행] 현인(上)

신라의 달밤에 빛난 풍운앚거 삶의 편린

故현인 선생의 노래들은 50, 60년대 서민의 슬픔과 향수를 달래 준 희망의 가락이었다. 시원하게 내지르고 부르르 떠는 그의 창법은 압권이었다.

그는 한국전쟁이 끝난 50년대 초 탱고, 맘보, 샹송, 칸초네 등을 본격적으로 도입해 삶의 고단함에 지친 국민들에게 흥겹고 경쾌한 서구 리듬을 전파했던 ‘최초의 월드 뮤직’ 가수였다.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지 않은 당시, 국민들은 그의 새로운 노래에 마음을 빼앗겼다.

본명이 현동주인 현인은 노래만큼이나 유쾌한 풍류 남아였다. 그는 1919년 12월 14일 부산 영도에서 영국의 스탠더드 석유회사 직원이었던 부친 현명근씨와 일신 여학교를 나온 신여성이었던 모친 오봉식씨의 2남 1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친 회사의 사원 주택이 있던 영도와 할머니댁이 있는 동래군 구포면을 오가며 성장했다. 그의 부친은 석유 회사를 다니다 일본 마이니치 신문의 동경 지사 기자가 되어 일본으로 떠났던 엘리트였다. 5살 때 부친을 만나기 위해 동경으로 간 그는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러시아의 베이스 가수 샬리아핀의 독창회 때 처음으로 음악을 접했다.

뒷날 그는 “큰 감명을 받고 이때부터 가수의 꿈을 키우게 되었다"고 말했다. 총명했지만 장난꾸러기였던 그는 동래의 구포 소학교에 입학, 2학년 때 초량에 있던 영주 소학교로 옮겼다. 5학년 때 부친이 경성 지국으로 전근을 오면서 서울 서대문 죽첨 소학교로 전학을 와 1931년 경성 제2 고보(현 경복 중고등학교 전신)에 진학했다.

영어와 일어 그리고 음악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학교의 배구 대표 선수였을 만큼 운동도 잘했다. 방과후에는 밴드부에서 일본의 대중 가요나 미국의 포크 송을 트럼펫으로 즐겨 불렀다. 3학년 때 장티푸스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던 그는 어머니가 동생을 낳다가 세상을 떠나는 아픔도 겪었다.

1935년 어린 시절의 꿈인 파일럿이 되기 위해 일본 육사 시험을 치르려 동경으로 갔다. 하지만 일본 군인이 되기 싫다는 생각이 들자 반항심으로 우에노 음악 학교 성악과에 입학 했다. 화가 난 부친 때문에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마이니치 신문의 보급소에서 1년 간 신문을 포장하는 중노동을 해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1년 뒤 우연히 NHK에서 합창단원을 모집하는 광고를 보고 오디션을 통과해 합창단원이 되었다. 그는 우에노 음악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독일 음악 이론 보다는 미국의 재즈나 프랑스의 샹송이 더 좋았다.

당시 일본에는 세계 각국의 대중 가요가 크게 유행했다. 그는 방송국에 드나들며 각국의 최신 음악 정보나 악보를 구해 열심히 익혔다. 1939년 창시개명령이 내려지자 일본신문사에 근무했던 부친의 명에 따라 고토 징(後藤仁)이라는 일본 이름을 얻었다. 해방 후 그가 현인이라는 예명을 갖게 된 것도 이때 붙인 이름을 따랐기 때문이다.

일본 유학 시절 그는 황족 출신의 마리코와 교제를 하기도 했지만 본과 3학년 때 귀국해 소학교 교사였던 조창길과 첫 결혼을 했다.

1942년 우에노 음악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을 해 성악 교수가 되려 했지만 여의치 않자, 성보 악극단의 음악 교사로 들어 갔다. 1943년 2차 대전이 치열해지자 징용을 피하기 위해 박단마, 황해, 진방일 등과 악극단을 구성해 중국 천진으로 떠났다.

이때부터 그는 천진의 클럽 신태양의 무대에 올라 샹송 등 외국 가요를 본격적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북경, 항주 등 중국의 주요 도시 순회 공연을 다니다 상해에 정착했다. 비교적 자유로운 도시였던 상해의 국제 클럽에 취직한 현인은 영국인과 포크투갈인의 혼혈 처녀였던 마리아라는 여가수와 사랑에 빠져 1년 반 동안 동거했다.

1945년 12월 일본이 패망을 하자 귀국길에 올랐지만 일본군을 위한 위문 공연을 했다는 이유로 북경 비밀 형수소에 수감이 되어 갖은 고초를 겪었다. 동요 70여 곡과 훗날의 대히트작 '서울야곡'이 바로 이때 작곡됐다.

6개월 후 그는 석방이 되었지만 애써 적어둔 악보와 가사들이 비밀 문서로 오인돼 빼앗겨 버렸다. 천신만고 끝에 서울로 돌아 왔다. 수소문 끝에 부친은 부산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중이고 아내는 이천에서 교사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는 당시 가족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 당한 존재였다.

이후 홀로서기를 시작한 그는 벌이가 좋은 미군 위문 공연에 뛰어 들었다. 당시는 탱고가 크게 유행하던 시기. 바이올린 연주가인 이장백, 김광수씨와 탱고를 전문으로 하는 고향경음악단을 조직, 1947년 최초의 나이트클럽인 충무로 신문회관의 뉴스맨스 클럽 무대에 섰다.

이때 '서울야곡'을 슬쩍 불러보았다. 외국 곡이 아닌 우리말로 불리어지는 탱고 풍의 가요에 관객들은 신기한 반응을 보였다. 비슷한 무렵 마도파 옆 골목에 국내 최초로 300여명을 동시에 수용하는 최고급 극장식 맥주홀 은성살롱이 생겨났다. 현인은 이곳에서 김광수악단과 엄토미 악단의 반주로 번안 곡을 위주로 활동을 했다.

제법 밤무대에서 이름이 알려지자 작곡가 박시춘씨가 자신의 신곡을 불러보겠냐는 제의를 해왔다. 음악 학교를 나온 현인은 '샹송과 탱고 등 외국 곡이 아닌 가요는 부르지 않겠다'는 고집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유명 작곡가인 박시춘의 제의를 거절하기 힘들어 악보를 받아 불러 보니 취향에 어울리는 곡이었다. 박시춘은 이 노래를 통해 해방의 감격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 노래가 바로 그의 대표곡이 된 '신라의 달밤'이다. 며칠간의 고민 끝에 가요 가수로 나설 결심을 내렸다. '신라의 달밤'은 스페인 춤곡 볼레로 리듬이었다.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3/06/25 15:23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