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쿼터(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로 나라가 시끄럽다. 한·미투자협정 실무협상에서 미국이‘내년부터 146일을 30일로, 2001년부터는 폐지’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요구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88년 할리우드영화 직배성공 후, 틈만 나면 이를 없애라고 압력을 가했다. 그 때마다 우리는 경제논리가 아닌 문화논리로 그들의 입을 봉했다. 강력한 응원자이자 핑계거리인 프랑스가 있었다.

1998년의 겨울은 다르다. IMF한파로 빚쟁이가 됐고, 아직도 한 푼의 돈이 아쉽고, 물건 한 개라도 더 팔야야 하는 우리로서는 이미 지고 들어가는 싸움이 됐다. 김대중대통령이 선거공약을 어길 만큼 절박한 입장이다. 미국은 우리와의 협상결과를 프랑스에게 무기로 들이댈 생각에서 어느 때보다 강한 자세다. 영화인들이 외교통상부의 “스크린쿼터는 축소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결사반대를 외치는 것도, 4일부터는 시민단체협의회 참여연대 민주노총 경실련 민예총 등 22개 단체와 ‘우리영화지키기 시민, 사회단체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이런 바뀐 상황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영화인들은“이제 한국영화는 죽었다”는 상징으로 자신의 얼굴사진으로 영정을 만들고, 한국영화 필름으로 치장한 상여를 들고 나와 시위를 한다. 그렇다면 정말 스크린쿼터 폐지가 곧 한국영화의 죽음인가. 한국영화는 인큐베이터 안에서만 자랄 수 있는가. 분명한 것은 지금보다는 어렵다. 우선 공간(극장)이 없어진다. 할리우드영화는 블록버스터(흥행작)와 방대한 작품수로 배급망을 장악한다. 극장은 그들의 요구(끼워 배급하기)에 따를 수 밖에 없다. 거부하면 다음에 흥행작을 주지 않을 것이다. 이어 마치 선심쓰듯 5억달러(약 6,500억원)를 투자해 기존 극장들을 임차하거나, 수십개 극장을 지어 영화를 상영, 극장수익(입장료의 40%)까지 챙길 것이다.

배급라인이 없어진 한국영화까지 직배사에 의존해야 한다. 국내 외화수입업자 역시 같은 입장이다. 단순히 25%(600억원)를 차지하는 한국영화시장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전체 영화시장(2,500억원)의 55%를 차지하는 극장수익까지 그들의 손에 들어가기 쉽다. 할리우드영화의 천국이 된다. 일본이 그랬다. 애초 스크린쿼터같은 제도가 없었던 일본은 70, 80년대 무참하게 무너졌다. 한때 할리우드가 95%까지 장악을 했다. 젼통의 영화사들이 부도에 몰렸고, 지금도 일본영화는 주요 극장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강제로 극장에서 한국영화를 상영하게 해야 하나. 영화인들은 우리영화의 시장점유율이 40%가 될 때까지라고 한다. 그것이 안되면 영원히 존속시키란 말인가. 여기에 대해 영화인들은 감시단의 활동으로 스크린쿼터가 제대로 지켜지기 시작한 94년(13%)이래, IMF한파로 제작편수가 줄어도 오히려 한국영화시장이 꾸준히 성장해 지금은 25%까지 늘어났다는 점을 강조한다. 할리우드폭풍 속에서 그나마 자국영화시장을 20% 이상 갖고 있는 나라는 우리와 프랑스, 일본 뿐이다. 영화인들은 프랑스 역시 스크린쿼터의 힘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아무 장치도 없는 일본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일본영화는 20년이 걸렸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독창성을 살린 경쟁력으로 다시 일어섰다.

정부가 어떻게든 빨리 IMF관리체제에서 벗어나려 하고, 또 그것이 ‘성공한 정치’라고 생각한다면 위험하다. 눈 앞의 이익만 생각해 미래에 더 많은 것을 잃는다면 올바른 선택이 아니다. 더구나 문화는 무너질 때는 하루아침이지만 되살리려면 엄청난 고통과 시간이 필요하다. 영화인들은 스크린쿼터가 독과점을 방지하는 자유시장경제원칙에 맞는 장치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우산 아래서 한국영화는 어설프게 할리우드영화나 베끼고, 영화인들은 서로 자기 이익만을 위해 행동한다. 독립영화와 대학졸업작품이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웃지 못할 현실. 이 시대가 책임보다는 권리를 앞세웠던 영화인들에게 권리와 책임을 깨우치려 하는건지도 모른다.

이대현· 문화과학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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