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체제 이후 서민들의 어려운 생활상을 반영하듯 요즘 우리사회에서는 ‘자린고비’ 가 미덕(?)으로까지 여겨지고 있다. 구두쇠 혹은 지독히 인색한 사람을 지칭하는 보통명사 자린고비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옛날 어느 구두쇠가 부모제사에 쓰는 지방(紙榜)을 매년 갈아쓰기가 아까워 기름에 절여 쓴데서 연유한 ‘절인 고비’ 가 변음(變音)됐다는 얘기가 있고 구두쇠처럼 모은 돈을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준 사람을 기려 세운 송덕비 ‘자인고비’ (慈仁考碑)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린고비의 주인공이 구전속의 가상인물이 아니라 실제 생존했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옛부터 우리나라 방방곡곡에는 가난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부자가 된 사람들의 일화가 많이 전해져오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조선영조때 충청도 음성고을의 조륵(趙륵(王변에 力)·1649~1714)의 이야기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바로 조륵의 구두쇠 인생이 자린고비의 원조로 일컬어진다.

자린고비의 주인공은 충북 음성의 실제인물

조륵은 지금의 충북 음성군 금왕읍 삼봉리 증삼마을에서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지독하게 인색해 주위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했으나 말년에 평생모은 재물을 이웃에게 골고루 나눠져 임금으로부터 가자(加資·정 3품·통정대부이상의 품계)벼슬까지 받았다고 전해진다.

음성군지(君誌) 등 각종 기록에 따르면 조륵은 인정 사정없는 진짜 구두쇠의 대명사였다.

제사에 쓰고 난 조기를 천정에 매달아 반찬삼아 밥을 먹으면서 식구들이 어쩌다 두 번이상 쳐다보면 “얘, 너무 짜다 물켤라” 고 호통쳤다든지 장독에 앉았다 날아간 쉬파리를 다리에 묻은 장이 아깝다며 단양 장벽루까지 아갔다는 일화가 그것이다. 또 무더운 여름철에 부채를 사다놓고 그 부채가 닳을까봐 벽에 부채를 매달아놓고 머리를 흔들었다는 ‘고금총서’ 에나 나옴직한 수없는 기행이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이런 일화도 있다. 전라도에서 소문난 구두쇠가 조륵의 소문의 듣고 찾아와 하룻밤을 묵는데 저녁때 밥풀 몇알을 남겼다가 자기가 가져온 창호지 조각을 창구멍에 붙이고 잤다. 이튿날 아침 손님은 “조선생, 문에 발랐던 종이는 내것이니 가져가렵니다” 라며 창호지를 뜯어 집을 나선뒤 5리쯤 돼서였다. 조륵이 헐레벌떡 뛰어와 “종이에 붙은 밥풀은 우리 것이니 놓고가야 한다” 며 칼로 밥풀붙였던 자리를 긁어내 주머니에 담아 가지고 돌아갔다. 전라도 구두쇠는 “과연...” 이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조륵의 인생관은 회갑을 맞으면서 완전히 바뀐다.

부지런히 일하고 절약한 덕택에 음성고을에서 최고 갑부가 된 그는 회갑연 때 마을 사람들에게 푸짐하게 음식을 베푼뒤 거의 모든 재산을 가난에 허덕이는 농부들에게 나눠주었다.

한양 조씨 족보에는 조륵이 가뭄으로 3년동안 기근에 시달리던 영호남 1만여 가구에 구휼미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감화를 받은 경상 전라도현감들은 ‘자인고비’ (慈仁考碑)라는 송덕비를 잇따라 세웠다고 한다. 조정에서도 그의 자비정신을 높이 평가해 벼슬을 내렸으나 그는 이를 사양했고, 죽은 후 검소하게 장례를 지내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절약정신 새기기 위해 생가터에 ‘유래비’

현재 조륵이 살았던 증삼마을에는 그의 생가터가 남아있고 충주시 신니면 대화리 화치마을 뒷산 중턱에는 그의 묘가 있다. 후손들은 95년 묘소에 조륵의 공적을 상세히 기록한 송덕비를 다시 세웠다.

조륵의 10대손인 조성필(趙成弼·48)씨는 “선생의 절약정신을 기리기위해 매년 종친회에서 시제를 올리고 있다” 며 “자린고비 얘기는 한낱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경제난국에 처한 지금 우리들이 새겨들어야 할 삶의 지혜” 라고 말했다.

충북 음성군(군수 정상헌)은 조륵 선생의 근검절약 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연말까지 자린고비 유래비를 선생의 생가터에 세우고 중부고속도로 음성 인터체인지 입구에 자린고비 안내판을 세울 계획이다.

또 선생의 생가를 복원해 후세들에게 근검절약 교육장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제1회 자린고비 대상 수상자 이상구씨

충북 음성군이 구두쇠의 대명사가 된 조륵 선생의 절약정신을 기리기위해 제정한 제 1회 자린고비 대상을 수상한 이상구(李相九·59·음성군감곡면왕장리)씨는 현대판 공인 ‘자린고비’ 다.

이씨는 조륵 선생처럼 천성적인 억척과 끈기로 평생 근검절약을 실천했다.

끼니도 못이을 정도로 가난한 농부의 3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난 이씨의 구두쇠 인생은 16세때부터 시작됐다.

동생들 학비를 대기위해 감곡면내 제과공장에 취직을 한 이씨는 4년여동안 밤잠을 설쳐가며 억척스럽게 돈을 모아 4,000여평의 과수원을 마련했다.

일거리가 많았지만 한 번도 일꾼을 사 본적이 없다. 품삯이 아까워서였다. 한번은 과수에 물을 주기위해 잠 한숨자지 않고 물 500지게를 혼자 길어 나르기도 했다. 한겨울 볼일보러 경기도 이천에 갔다가 여관비를 아끼느라 영하 20도 추위에 자전거를 끌고 새벽 3시에 귀가했을 정도다.

물론 인색할 정도로 안쓰고 안먹었다.

돈이 아까워 술 담배는 아예 생각조차 못했고 눈물겨운 절약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됐어도 친구들에게 술 한 잔 산적도 없다. 5명의 동생과 4자녀 학비를 대기위해 절약을 하느라 항상 반찬은 김치 한 가지뿐이었다.

주위에서는 “노랑물 한 방울 안 나올 사람” 이란 소리까지 듣기도 했다.

그러나 이씨는 인색하게만 산 것은 아니었다.

주위 사람들의 외면을 살 정도로 어렵게 모은 재산이지만 10여년전부터 매년 소년소녀가장이나 불우노인들을 돕는 한편 인근 군부대와 사회단체 등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억대의 부를 축적한 이씨지만 지금도 자녀들에게 “꼭 쓸데만 쓰라” 고 가르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관리시대가 꼭 1년이 되는 지난 11월 21일 포상을 받은 이씨는 “어렵게 살다보니 남보다 조금 아꼈을 뿐인데 과분하게 상을 받게됐다” 며 겸연쩍어했다.

음성=한덕동기자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