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이 끝나자 마자 곧바로 이럴 수 있느냐”

한나라당 이회창총재는 지난 12월 10일 동생 회성씨가 긴급 체포된 소식이 알려지자 극도로 분노했다. 심지어 이총재가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고 측근들은 전했다.

새해년도 예산안이 통과된 다음날 아침, 여권이 또 다시 이총재에게 비수를 들이댄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총재의 측근들도 “(여권을) 믿었던 우리가 어리석었다” 며 당혹감과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총재가 야당총재로 선출된 8·31 전당대회 다음날 여권이 세풍사건으로 칼을 겨눈뒤 ‘화해국면-뒤통수 때리기’ 를 계속 반복해오더니 이번에도 어김없다” 는 비난들이 곳곳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총재와 측근들은 이번 ‘회성씨 체포와 구속’ 사태가 여태의 ‘뒤통수 치기’ 와는 성격이 판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총재의 한 핵심측근은 아예 이번사건을 “(이총재가)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섰다” 고 간단히 규정했다. 이총재의 정치적 생명에 직결된 ‘절체절명의 위기’ 라는게 이들의 공통적인 인식이다. 청와대와 여권이 “회성씨 체포는 엄연한 범죄 혐의에 대한 조치이며, 어떤 경우에도 야당총재에 상응하는 예우를 지키겠다” 며 ‘정치적 의도’ 가 없음을 강조한 것에 대해서도 ‘립 서비스’ 라고 일축했다.

한나라당 “정치적 음모있다” 비난

한나라당은 이번 사건을 “여권이 ‘제2건국운동’ 과 ‘김훈중위 사망사건및 판문점 적 내통사건’ 으로 다급해진 나머지 파문의 확산을 막기위해 만들어 낸 것” 이라고 분석하고, 이를 비난하고 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이면, 즉 여권이 뻔히 정치적 파국을 몰고올 ‘세풍’ 사건을 선택한 속내를 눈여겨 봐야 한다고 이총재측은 지적한다. “청와대의 지시없이는 불가능한 것인줄 누구나 아는데도 왜 검찰이 예산이 통과된 다음날 새벽에 야당총재의 동생을, 그것도 출근하는 판사를 찾아가서까지 영장을 발부받아 긴급 체포했겠느냐” 는 것이다. “분명히 무언가를 노리는 정치적 음모가 개입됐다” 는 관측이다.

이총재 측근들은 여권이 회성씨를 구속했지만, 당장은 이총재에 대한 직접 조사나 사법처리의 무리수를 두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좀 길게 살펴 보면 이총재에게 족쇄를 채우려는 여권의 속셈이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이총재 측은 “여권이 단기적으론 당내 비주류와의 갈등을 확대시키고, 장기적으론 야권의 유일한 구심점인 이총재를 제거함으로써 향후 정계개편의 기반을 조성하려는 시나리오가 이번 사건에 숨겨져 있다” 고 해석하고 있다. 한 측근은 “청와대 주변에서 예산안처리 등을 겪으면서 ‘이총재를 정국의 파트너로 삼을 수 없다’ 는 말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도 이런 분석을 뒷받침하는 증거” 라고 말했다.

때문에 이총재와 측근들은 ‘이총재 죽이기와 야당 공중분해 음모’ ‘정치보복’ 이라고 비난하면서, 탈출구 모색에 부심하고 있다. 당 지도부는 일단 이번 사건을 주요법안처리와 연계시키기로 결정했고, 대선자금을 포함한 정치자금 전반에 대한 국정조사요구서와 천용택 국방장관 해임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등 초강경 대응수를 내놓고 있다. 정치자금 국정조사는 “여권에서 금기시되어온 정치자금을 건드린만큼 김대중대통령과 그 가족도 지난 대선에서 기업으로부터 받은 선거자금, 그전의 대선자금과 공천헌금 등을 함께 공평하게 조사하자” 는 맞불작전이다.

임시국회 소집, ‘이총재 단식투쟁’ 주문도

여권에 대한 효과적인 공격과 방어를 위해 18일 정기국회가 끝난뒤 곧바로 임시국회 소집도 검토하고 있다. 또 일부 관계자들은 “이미 받아둔 의원직 사퇴서를 국회에 제출한뒤 전의원들이 국회에서 농성을 하고 이총재도 단식농성해야한다” 고 이총재에게 주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외투쟁에도 돌입, 11일 오후 이총재를 비롯한 의원 및 중앙당 당직자들이 서울 시내 곳곳에서 ‘제2건국위의 문제점’ 을 홍보하는 유인물 배포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총재에겐 세풍 사건에 대한 방어 수단마저 부족하고, 장내·외 투쟁도 효과가 크지 못한 것도 문제지만, 당이 일사분란한 대응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또 다른 고민이라고 측근들이 지적하고 있다. 이총재에게 완전히 등을 돌린 당내 비주류가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소 닭쳐다 보듯’ 냉담하게 관전자 입장을 취하면서, 오히려 이총재를 궁지로 몰고 가고 있다” 는 것이 주류의 판단이다. 한 관계자는 “이총재의 처지는 한마디로 ‘내우외환’ 을 넘어 사면초가에 빠져 있다” 고 털어 놓았다.

비주류중 특히 이한동 전부총재와 서청원 전사무총장측의 입장이 더욱 강경하다. 이들은 “총재의 개인적인 일 때문에 당전체가 수렁에 빠져서는 안된다” 면서 이총재와 선을 분명히 그었다. 최근 열린 계보모임에서 이전부총재는 “사건이 드러나면 이총재의 분명한 태도가 있어야한다” 고 말했고, 서전총장은 “대선자금이 문제가 있다면 이총재 스스로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하고, 그래야 대여투쟁도 할 수 있다” 고 주장했다. 이들의 한 측근은 대선자금의 사용처에 대한 의혹마저 제기하며 “이총재가 (세풍에) 개입한 것으로 드러나면 이총재는 당권을 사퇴해야한다” 고 서슴없이 말하고 있다.

비주류 “나 몰라라”, 이총재측 “노림수 있다”

최근 이총재와 결별하고 비주류활동을 선언한 김윤환 전부총재는 지난 대선에서 이총재와 한배를 탄 것을 의식해서인지 이번 사건에 대해선 일절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김 전부총재측은 “스스로 동지를 차버리는 사람을 누가 도울 수 있겠느냐” 면서 도울 생각이 전혀 없음을 분명히했다. 신주류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김덕룡 전부총재도 “권력으로 부터 공격당하고 있는 지금 내분은 자제해야할때” 라면서도 “추후 대선자금 유입과 사용과정에서 밝힐 것은 밝히는 자기반성의 시간은 있어야 한다” 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이에 대해 이총재측은 “여권의 노림수가 그대로 맞아 떨어지고 있다. (비주류의 공세에) 할말은 많지만 적전 분열로 비쳐질 우려가 있다” 며 공식적인 맞대응을 삼가하고 있다. ‘외부의 공세’ 에 힘을 집중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일부 관계자들은 비공식적으로 “대선때 당대표가 나몰라라 하며 부족한 자금에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고, 이수성후보와 이인제후보를 도운게 누구냐” 며 비주류에 대해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8·31전대후 4개월째 접어들 동안 세풍, 정치권 사정, 야당의원 빼가기, 총풍등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던 이총재, 그가 새로운 당체제를 정비하자마자 또 다시 닥쳐온 ‘생사의 기로’ 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주목된다.

권혁범·정치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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