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패배 1주년(18일)이 지난 한나라당의 현주소는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여의도 중앙당사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는 엄동설한처럼 차갑고 썰렁하기만 하다. ‘한나라당호’ 의 지난 1년간 항해일지를 더듬어 보면 하루도 평온한 날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봄바람이 살랑거리던 4월3일 김종호 박세직의원이 자민련으로 말을 갈아탄 뒤, 지금까지 무려 28명의 ‘금배지’ 가 이탈했다. 소속의원의 탈당 러시로 대선직전 165석이던 의석은 137석으로 줄어들어, ‘거야(巨野)’ 의 모습을 허망하게 잃고 말았다. ‘야당파괴와 인위적 정계개편을 위한’ 여권의 음모라고 떠들어 보았지만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대선패배 직후 조순 명예총재에게 당권을 넘겨주고 2선으로 물러났던 이회창총재가 당권회복에 나서면서 촉발된 당내 분란도 만만찮았다. 우여곡절 끝에 이총재는 8월31일 전당대회를 통해 당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이날은 한나라당과 이총재가 ‘형극의 길’ 로 들어서는 출발선이나 다름없었다. ‘세풍사건’ 과 ‘총풍사건’ 등 매머드급 ‘핵폭탄’ 이 이총재와 그의 측근들을 향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그 여진은 아직도 멈추지않고 있다. 급기야 이총재의 동생 회성씨가 구속되는 사태를 낳았다. 정치권에 대한 사정태풍도 한나라당 의원들의 몸을 잔뜩 움츠리게 했다. 그 와중에서 몇몇 의원들은 정치생명을 상실할 만큼 치명상을 입었다.

소속의원 탈당 러시, 후원회 재력가 ‘썰물’

아무리 국제통화기금(IMF)체제라 하지만 당 재정에서도 ‘격세지감’ 을 절감하고 있다. 과거 여당시절 중앙당 후원회에 몸담았던 쟁쟁하던 재력가들은 대선 패배후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렸다. 돈 들어올 데라곤 분기별로 제공되는 25억원 안팎의 국고보조금이 고작이다. “몇몇 여당의원의 개인후원회에도 10억~20억원이 모인다” 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는 데도, 지난달 열린 한나라당 중앙당후원회에는 고작 3억원이 모였다. 그것도 절반이상이 외상인데다, 현금액의 3분의 1가량은 이총재 등 당직자들이 주머니를 털어낸 돈이다.

살림살이가 이렇게 빠듯하다 보니, 과거 여당때의 ‘공룡조직’ 을 야당에 걸맞게 슬림화하는 작업도 지지부진하다. 퇴직금을 마련하지 못해 구조조정에 애를 먹고 있는 실정. 한나라당은 이에 따라 고육지책으로 사무처 직원을 대상으로 내년 1월부터 3개조로 나눠 4개월간 무급휴직제를 실시하기로 했다. 전기세와 수도료를 제때에 내지 못해 단전 단수 통보를 받은 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야당으로서 혹독한 시련을 겪고있는 셈이다.

외부에 비쳐진 이같은 모습에 대해 한나라당의 자체평가는 어떠한가. 수도권의 한 초선의원의 진단. “우리당 의원과 당직자들은 솔직히 지난 1년을 숨돌릴 틈없이 보냈다. 내우외환이라고들 하는데, 돌이켜 보면 과거 야당에도 항상 갈등이 있었고, 현재 여당에도 잡음이 있지 않은가. 야당이 여당의 압박 앞에서 당황스러워 하는 모습도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외환의 실체는 여권이 야당과 야당총재에 대한 대선운동형태와 대선자금에 고리를 걸어 이미지와 지도력에 일대 타격을 가해서 강력한 야당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야당총재 죽이기와 야당탄압” 현정권 비난

3당합당과 민주당과의 합당으로 ‘다세대 주택’ 에 비유될만큼 다계파로 엮어진 당내 역학구도상, 40여년간의 야당생활로 잔뼈가 굵은 김대중대통령에 맞서기에는 애시당초 무리였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영남권의 한 의원은 이와관련, “여권이 여대야소라는 부담과 ‘초보여당’ 으로서의 불안감 때문에 집권 초반부터 야당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아 매질을 해댔다” 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이어 “과거 여당을 강력하게 견제해 온 김대중씨가 야당의 국정비판과 견제를 ‘발목잡기’ 로 몰아붙이는 것은 자가당착” 이라고 비난했다.

지난 1년간 한나라당이 보여준 대여관계는 과거 야당에 견주어볼 때, ‘사쿠라’ 라는 오해를 받을 정도로 최소한의 견제에 지나지 않았는데, 과민반응으로 일관했다는 주장이다.

한나라당이 18일 대선패배 1주년에 맞춰 ‘세상이 거꾸로 가고있다’ 는 타이틀의 ‘김대중정권 사실상 집권1년 평가서’ 를 통해 여권을 매몰차게 비판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보여진다. 타이틀에 부여한 의미는 “새 정부가 1년동안 민주화와 시장경제 동서화합의 달력을 거꾸로 넘겨왔다” 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이 보고서에서 정권교체 자체의 의미와 활발한 외교, 노동계의 큰 반발없이 진행된 구조조정과 금융개혁및 재벌개혁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칭찬부분은 13쪽짜리 내용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초보정권의 모자라는 점을 대선 상대후보인 야당총재 죽이기와 혹독한 야당탄압으로 위장하려했고, 집권 첫해부터 장기집권 포석 마련에만 혼신의 노력을 쏟아왔다” 는 지적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한나라당이 특히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대목은 ‘장기집권 음모’ 의혹. 전국단위의 관변형 조직인 제2건국위를 결성하고, 대구·경북·부산·경남·강원 경기 지역을 대상으로 무차별 영입작업을 벌였으며, ‘이회창 죽이기’ 와 주변인사 흠집내기, 야당파괴 공작을 끊임없이 벌였다는 주장이다. 고문의혹, 불법도청, 정치사찰, 편파수사, 편중인사, 국회 윤리위 날치기, 대선상대후보 자금 뒤지기, 금권·관권선거 자행, 이념 혼돈으로 인한 국론분열, 청와대 권력집중 등 과거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있었던 부정적 정치행태 재연도 항목별로 나열했다.

한나라당은 특히 “현정권도 YS정권의 전철을 밟고 있다” 고 지적한 뒤, “역사 바로 세우기는 이름만 제2건국으로 바뀌었고, PK공화국 정권은 호남향우회 정권이 됐고, 민주산악회의 위세를 아태재단이 물려받았고, 문민검찰의 야당편파 사정은 국민검찰과 야당 편파사정으로 대물림됐다” 고 주장했다. 심지어 정권핵심인사들의 대북커넥션, 현대 금강산관광 이면계약 등 ‘청문회꺼리’ 만 12가지나 된다고 목청을 놓였다.

이총재의 한 측근은 “만약 김대통령이 야당을 정치적 파트너로 인정하고 국정을 운영했더라면 아마 우리 정치사상 가장 온건하면서도 국정에 잘 협조하는 선진형 야당의 틀을 갖출 수 있었을 것” 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진정한 수권정당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자성과 선진형 야당의 정체성 확립이 시급하다는 지적에는 이론이 없어 보인다.

김성호·정치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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