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우드 영화‘귀여운 여인’을 보면 줄리아 로버츠가 생전 처음 오페라를 보면서 눈물 흘리는 장면이 나온다.‘라 트라비아타’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오페라를 보며 눈물을 흘렸을까. 가련한 여주인공을 노래하는 소프라노에 반해서 무대에 꽃을 던지거나 혹 짝사랑에 빠진 이도 있으리라. 프랑스 영화 디바’에도 흑인 소프라노에 매료된 소년이 나온다. 오페라의 힘, 음악의 힘에 붙들려 어두운 객석에 앉은 채 환상을 경험하는 일은 사실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꿈에서 깨어나면 냉정한 현실, 그러나 극장안에는 딴 세상이 있다. 대중적인 오페라일수록 무대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지극히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일 때가 많지만 음악의 아름다움은 뻔한 줄거리의 천박함 따위도 잊게만든다. 얼마나 바보같은 노릇인가. 멍청한 TV 연속극같은 내용의 오페라를 보고도 감동하다니.

11월 한달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는 그런 바보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라보엠’‘카르멘’‘리골레토’이 세 편의 오페라를 보려고. 작품마다 5회씩 총15회 공연에 입장객 숫자가 총 24,141명. 5만개 가까운 눈동자가 오페라를 본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중 대부분이 오페라를 잘 모르는 초보자라는 것이다. 음악을 좀 안다거나 전공하는 이들은 많지않았다. 공연 수준은 미식가들의 입맛에는 못미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극장 문을 나서는 관객들의 얼굴은 대체로 밝았다. “오페라? 어, 재미있네”라는 표정들. 신인들의 열연, 생기 넘치는 무대 덕분이었다.

사상 최악의 경제난으로 외식 한번도 망설여지는 쪼들리는 살림인데, 왠 오페라? 그것도 사상 유례없는 흥행 성공에 앞으로도 다시 있을 것 같지않은 매

진사태까지 빚으며. 구조조정과 실업의 폭풍속에서 얼어붙고 쪼그라든 마음에 위로가 필요했던 걸까, 오페라극장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몰린 것은.

공연된 세 편은 한결같이 통속적인 줄거리다. 아름답고 위험한 여인의 유혹에 빠져 신세를 망치고 결국 변심한 여자에게 사랑을 애걸하다 거절당하자 죽여버리는 외곬수 남자(‘카르멘’의 돈 호세), 바람둥이에게 농락당하고도 그를 사랑해 대신 죽임을 당하는 미련한 여자(‘리골레토’의 질다), 가난때문에 병든 애인을 돌보지 못하자 자책과 질투로 괴롭혀, 아버리고는 애인의 죽음에 비통해하는 무능력한 시인(‘라보엠’의 로돌포). 별로 새로울 게 없다. 그런데 무대는 항상 새롭다. 같은 작품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르고 같은 팀이라도 매번 다르다. 무대는 살아있기 때문이다.따라서 객석에서 느끼는 것도 매번 달라진다.

무대 앞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오케스트라가 올라온다. 지휘자가 청중을 향해 인사를 한 뒤 서곡을 연주하기 시작하면 청중들은 귀를 쫑긋 세운다. 오페라줄거리를 암시하는 서곡이 끝나갈 무렵 서서히 객석에 불이 꺼지고 막이 올라간다. 그러면 갑자기 딴 세상이다. 바람둥이 공작의 화려하고 방탕스런 궁정 파티장(리골레토), 혹은 스페인 남부 세비야의 햇볕 쏟아지는 거리(카르멘), 가난뱅이 시인과 화가, 철학자, 음악가 친구들의 추운 다락방 (라보엠). 그 다음은 음악이 이끄는 대로, 무대가 유혹하는 대로 따가라면 그만이다.

지루하면 하품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멋진 아리아가 흘러나오면 자다가도 일단 깨어날 필요가 있다. 돈호세가 부르는 뜨거운 사랑의 고백‘꽃노래’, 사랑에 빠진 질다가 노래하는‘그리운 그 이름’, 시인 로돌포와 미미가 어슴프레 달빛 비치는 다락방에서 처음 만나 주고받는 노래 ‘그대의 찬 손’‘ 내 이름은 미미’등. 이들 노래가 끝나면 대개 브라보가 터진다. 갈채가 없다면 신통치 않았다는 뜻이리라. 내내 졸더라도 멋진 아리아 한 곡 들은 것으로 오페라 구경의 보람을 느낄 수도 있다.

오페라 페스티벌 중‘카르멘’마지막회 공연이 끝났을 때, 밤하늘엔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추위에 몸을 움츠린 채 휘날리는 눈발에 귀가길을 걱정하면서도 마음은 더웠다. 세비야의 태양을 품은 듯, 카르멘이 던져준 꽃을 시들도록 간직한 돈호세의 마음인 양, 혹은 집시여인 카르멘의 정열처럼. 오페라의 힘, 예술의 힘으로 데워진 열기였다.

오미환·문화과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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