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의 20세기가 저물고 있다. 화가의 눈은 이 시대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문혁(문화대혁명) 직후 화가 청총린은 ‘1968년 X월 X일, 눈’에서 문혁에 대한 격렬한 항의와 분노를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이제 90년대의 작가 펑명보는 문혁의 전위 홍위병을 조롱하고 있다. 전자오락 ‘스트리트 파이터Ⅱ’의 캐릭터로 삼아, 문혁이라는 거대한 사건 자체를 키치화시켰다.

이렇듯 미술은 동시대에 대해 격렬하게 참여(앙가제)하기도 한다. ‘미술로 보는 20세기’는 20세기 미술이 우리 시대를 어떻게 보고, 언급해 왔는가를 거장들의 작품을 통해 추적한 책이다. 모두 12장으로 짜여진 방대한 분량이지만, 생생한 도판과 대화체적 서술방식 덕택에 문외한들도 현대미술의 흥미진진한 세계로 들어가는 길을 틔워준다. 일반인들에게는 ‘현대미술이란 이런 거로구나’하는 통찰에 이르게 하는 묘미가 있다.

1장 ‘야망의 도시’. 메트로폴리스라는 생활공간 상의 엄청난 격변과 맞닥뜨린 화가들의 낙관과 비관은 지금도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던진다. 무기력한 관음, 도시의 고독, 고립된 운명.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2장 ‘지하철’. 도시의 가장 격렬한 공적 영역에 화가들의 감수성은 어떻게 개입하는가. 젊은 화가 이상권이 95년 우리의 궤짝 지하철을 그린 ‘도시생활’도 있다.

3장 ‘범죄’는 도시라는 공간 곳곳에 스며 있는 죄악의 이미지들로 가득차 있다. 폭력과 범죄는 어느덧 20세기의 가장 인상 깊은 표정이 돼 버렸기 때문일까.

‘유행과 패션’에서는 우리 시대가 욕망을 창출해 소비를 이끌어 내는 일련의 과정이 화가들의 시선으로 포착돼 있다. 우리 시대는 섹스 이미지를 창출하고 소비해, 이윤으로 직결짓는다. 왜 한 시대 여성의 이미지가 창부의 상에 의해 압도돼야만 했던가? 화가들은 부르조아사회를 향해 말한다. “네가 오히려 진짜 창부다.”

그같은 혼돈상이 극으로 표출된 것이 ‘성의 상품화’. 포르노배우인 부인과 공개적으로 가진 성행위가 예술을 통한 종교적 해방이라는 주장까지. ‘에이즈시대의 성’에 이르러서는 상식은 철저히 기만될 각오를 하자.

개인을 뛰어 넘은 역사의 조명. 이 책의 강점이다. 멕시코혁명, 러시아혁명, 문화대혁명이 일련의 미술품과 함께 조망된다. 한 편에서는 역사가 격동하지만, 또 한 편에서는 제임스 딘과 마릴린 먼로가 시대를 움직인다. 그 궁극이 낙원의 아담과 이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까지 희화화하는 키치미술이다. 바로 매스미디어가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들.

그러나 현실은 때로 악몽보다 더 비참하다. 언제나 인류에게 절대 저주로 실존하는 전쟁. 제1차, 2차 세계대전, 한국전, 베트남전등 재래전에 이어, 얼굴 없는 전쟁 걸프전까지 화가들을 사로잡았다. 경제적 공황, 정치적 탄압과 양심수의 문제에 이르러 미술은 언어보다 더 격렬하다.

퇴폐미술은 무엇이며, 왜 존재하는가. 우리 시대의 인종갈등과 물신주의는 그림으로 어떻게 표현될까? 니체, 프로이트, 브레히트, 사르트르, 자코메티, 푸코, 마그리트등 현대 사상가와 미술의 관계는? 나아가 포스트 모더니즘과 페미니즘, 현재의 잡다한 일상, 영화적 이미지, 테크노피아, 핵, 가상현실등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제는 우리 시대 화가들에게 어떤 영감을 주는가?

책의 궁극적 해결점 또는 비전은 자연. 자연은 ‘영원한 구원의 이미지’이자, ‘저항’ 또는 ‘역류(逆流)에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지은이 이주헌(38)은 홍대미대 서양화과 졸업후 신문기자로 일하다, 현재는 아트스페이스 서울관장겸 미술평론가로 활동중이다. [장병욱 문화과학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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