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의 난' 이후 그룹해체·정치적 소용돌이 등 시련의 연속

[정몽헌 쇼크] 멈추지 않는 현대가의 비운

'왕자의 난' 이후 그룹해체·정치적 소용돌이 등 시련의 연속

현대 가(家) 비운의 끝은 어디일까. 8월4일 오전 정몽헌(MH)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의 투신 자살은 현대 정씨 일가가 겪어 온 심한 부침과 파란의 연속선상에 있다. 개발 독재 시대 국가 산업의 발전을 주도하며 ‘대한민국 대표 기업’으로 수십년을 호령했지만, 기업을 일군 정씨 일가에게 닥쳐온 잇따른 비운은 좀처럼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명예회장 사망이후 급격한 내리막길

현대가의 시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그룹 분열의 시발점이 된 2000년 ‘왕자의 난’이었다. 동생인 MH를 후계자로 지목하려던 아버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뜻에 반발해 형인 정몽구(MK) 회장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 발단이었다.

결국 부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MH는 현대건설과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 현대상선 현대엘리베이터 등 주력 계열사를 물려 받았지만, MK가 장악하고 있던 현대ㆍ기아차 계열을 아우르는 데는 실패했다.

2001년 정 명예회장이 타계하면서 분열은 시작됐다. MK가 자동차그룹을 분리해 낸 데 이어, 6남인 몽준(MJ)씨도 현대중공업 그룹을 이끌고 현대를 떠났다.

‘왕자의 난’에서 공식적으로 법통을 물려받은 것은 MH였지만 분위기는 반전됐다. 취약한 재무 구조가 점차 악화하기 시작한 것. 현대건설과 하이닉스반도체는 심각한 유동성 위기 끝에 2001년 5월 대주주 지분 완전 감자, 채권단 출자 전환 등으로 그룹에서 사실상 떨어져 나갔다.

MH가 이끄는 현대그룹은 결국 대북사업을 맡은 현대아산과 현대상선, 현대종합상사, 현대택배 등을 거느린 소그룹으로 축소됐다. MH는 이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대북 사업에만 전념했으나 이마저도 금강산 관광 사업의 부진, 북한 핵문제로 인한 남북 냉각 기류, 대북 송금 특검 수사 등에 잇따라 휘말리며 나락으로 추락했다.

국회의원 신분으로 현대중공업 계열을 이끌던 MJ도 ‘왕회장’ 사망 이후 심한 부침을 겪어야 했다. 2002년 한ㆍ일 월드컵 조직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월드컵 유치에 성공하고, 우리나라가 4강 진출의 신화를 이루면서 국민적 영웅 대접을 받았다.

또 국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지난해 대선에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노무현 대통령과 막판 극적인 후보 단일화에 성공하면서 찬사를 한 몸에 받기도 했다. 하지만 빛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선거를 바로 하루 앞두고 단일화를 철회하면서 MJ는 일순간 역적으로 내몰렸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에 이어 대를 이어 대선에 출마했지만 두 번 모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를 맛본 것이다.


정씨 일가, 계속된 추락

한때 재계 서열 10위권을 넘봤지만 97년 해체된 한라그룹도 현대가의 비운을 보여준다. 창업주인 정인영 전 명예회장의 차남인 몽원씨가 후계자로 그룹을 이끌어 왔으나 외환 위기 직후인 97년12월 한라중공업 부도와 함께 계열사 대부분이 문을 닫아 현재는 한라건설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더구나 후계자 경쟁에서 밀려난 장남 몽국씨가 자신 소유의 한라시멘트 주식을 임의 처분했다며 몽원씨를 고소, 형제간 갈등까지 빚었다.

MH의 투신 자살로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아들 8명 가운데 벌써 3명이 숨졌다. 장남이었던 정몽필 당시 인천제철 회장은 82년 교통사고로 숨을 거뒀고, 4남인 몽우씨는 90년 MH와 마찬가지로 자살의 길을 택했다.

이영태기자


이영태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