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선수 최초 ‘그랜드 슬램’ 달성...  ‘살아 있는 전설’ 

프로당구 선수 최성원이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이혜영 기자)
프로당구 선수 최성원이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이혜영 기자)

[주간한국 정완주 기자] ‘승부사’는 결정적인 순간에 기적처럼 역전 드라마를 쓰는 선수를 일컫는 말이다. 대한민국 당구를 대표하는 승부사로 누구나 최성원(46·휴온스) 선수를 떠올린다. 한국 당구 선수로는 최초로 세계선수권, 월드컵, 마스터스, 세계 팀3쿠션선수권을 제패하고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전설’이다. 경기장에서 승부에 임할 때 터져 나오는 특유의 ‘카리스마’는 감히 범접하기 힘들다. 최근 방송에서 한 해설위원이 최성원을 향해 ‘선수 위의 선수’라는 평가를 내려 눈길을 끌었다. 지난 11월 4년여 만에 우승한 최원준 선수도 공개적으로 최성원의 실력과 경기 운영 능력에 대해 한 수 접고 인정할 정도였다. 하지만 세계선수권대회 우승 이후 최성원의 부침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PBA로 넘어왔지만 4연속 128강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4전 5기’의 투지로 첫 우승을 일궈냈다. 전성기 시절의 냉혹한 승부사로 귀환한 것이다.

후배 김경률과의 소중한 인연
세계선수권 최초 우승의 발판

부산 출신의 최성원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당구를 접했다. 부친이 차린 당구장에 살림집이 딸려 있었던 탓이다. 2년 만에 당구장 문을 닫았지만 고등학교 시절 다시 당구를 치면서 실력이 급성장했다. 어린 나이에 배운 실력이 몸에 밴 탓인지 고3 때 4구 기준으로 500점을 쳤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문대학을 다녔지만 1년 뒤 자퇴를 하고 딱히 할 일을 찾지 못해 당구장을 전전했다. 자연스럽게 내기 당구(죽방)를 즐겼고 ‘모기’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부산 일대를 휘어잡았다. 모기가 사람 피를 빨아먹는 것처럼 상대방의 돈을 따먹는다고 해서 얻은 별명이다.

“군 복무를 마치고 25살 때 우연히 국제식 대대를 처음 보았고 그때 당구도 선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수소문을 해보니 가입비만 내면 대한당구연맹 소속 선수로 등록이 된다고 해서 바로 선수가 됐죠. 물론 부모님께서 역정을 내셨지만, 2004년 경기도 안산에서 열린 전국대회에서 우승하고 받은 상금 300만원을 봉투째 부모님께 드리면서 인정받으려고 노력했어요.”

최성원의 당구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고(故) 김경률 선수다. 김경률은 한국 국적으로는 처음으로 3쿠션 월드컵대회 우승을 일군 최정상급 선수로 활동하다 2015년 2월 생일 하루 전 자택 아파트에서 의문의 ‘실족사’로 사망했다.

“경률이가 고등학생일 때부터 알고 지냈어요. 그러다 제가 선수 등록을 한 후 함께 부산에서 같이 선수로 뛰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죠. 그런데 경률이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형님, 전 부산에서 선수 할 거면 안 합니다. 서울로 갈 겁니다. 나중에 저랑 월드컵대회를 나가시죠’라고요. 이후에 월드컵대회에 나가 타국에서 둘이 야외 공원을 찾아 도시락을 먹던 추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꾸준하게 월드컵대회를 통해 세계 정상급 선수들과 어깨를 겨룬 최성원은 2011년 프랑스에서 열린 아지피 빌리어드 마스터스대회에서 첫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이듬해 터키 세계 3쿠션 월드컵대회 우승에 이어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세계 3쿠션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을 기록했다. 그리고 마침내 2014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 3쿠션선수권대회에서 ‘4대 천왕’인 스웨덴의 토브욘 브롬달 선수를 꺾고 한국 선수 최초의 우승이라는 쾌거를 이룩했다.

“지금도 세계선수권 우승 순간의 벅찬 감격이 잊히질 않죠. 당구 선수로서 가장 기쁘고 자랑스러운 업적이니까요. 경률이의 큰 포부에 자극을 받아 국내 1위를 뛰어넘어 세계 1위가 되자는 목표를 그때 달성한 겁니다. 세계대회에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선구자 역할을 같이 일군 셈이죠.”

김경률 ‘실족사’로 큰 충격
팔 떨림 부상과 함께 긴 부진

프로당구 선수 최성원이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이혜영 기자)
프로당구 선수 최성원이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이혜영 기자)

최성원은 2015년 1월 한국 선수 최초로 세계 랭킹 1위 자리에 올라섰다. 이전에는 김경률이 2011년 세계 2위까지 오른 것이 최고 기록이었다. 하지만 그의 전성기는 정상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내리막길을 걸었다. 막역한 후배 김경률의 사망으로 인한 충격이 발목을 잡았다.

“벨기에로 날아가 경기를 하던 중인데 강동궁 선수한테 전화가 왔어요. 경률이가 갑자기 실족해서 숨졌다는 겁니다. 정신이 멍해지더라고요. 바로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와 빈소를 찾았는데 현실감이 계속 없었어요. 바로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오면서 그때부터 인생이 마냥 허무해지는 겁니다.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오른 당구도 모두 허탈해지고 아무 의욕이 생기지 않았어요.”

최성원이 세계 랭킹 1위에 오른 지 불과 한 달 만의 일이다. 그 충격은 그의 당구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의욕 상실과 동기 부여가 사라지면서 사실상 큐를 놓고 연습 시간을 따로 갖지 않았다. 대회가 열릴 때만 설렁설렁 나가서 대충 경기에 임했다.

당구계에서는 오죽하면 “최성원이 연습만 좀 하면 당해낼 선수가 없다”는 말이 떠돌기도 했다. 김경률 사고 이후 최성원이 사실상 당구에 손을 놓고 연습을 멀리한다는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것이다. 일각에서는 최성원이 세계 정상에 오르자 오만해져서 연습을 게을리한다고 오해를 사기도 했다.

고질적인 어깨 부상도 최성원을 괴롭혔다. 2012년 왼쪽 어깨 회전근개 파열로 뼈를 깎아내는 수술을 감행했다. 관절을 둘러싼 4개의 힘줄 중 하나가 끊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재활 치료에 전념하지 못해 심한 팔 경련 부작용이 찾아왔다.

“수술 후 왼팔에 깁스를 했는데 한 달 후에 이미 초청된 대회가 열렸어요. 약속을 어길 수가 없어서 깁스를 풀고 펴지지 않는 팔로 브리지를 한 채 대회를 치렀는데 결국 이게 화근이 됐습니다. 제대로 재활하지 못하고 무리하게 왼팔을 움직인 대가로 팔 신경에 이상이 생긴 겁니다. 사실 세계선수권대회 우승할 당시에도 경련 증상이 있었죠. 그나마 건강할 때는 견딜 만한데 체력이 바닥나면 떨림이 매우 심해졌어요.”

3~4년 동안 최성원의 국내 대회 성적은 잘해야 4~8강에 머무를 뿐 우승권을 다투지 못했다. ‘최성원도 이제 한물갔다’라는 말이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면서 세계캐롬연맹(UMB)이 주최하는 월드컵대회 참가도 점점 버거워졌다. 연습을 거의 하지 않는 편이라 따로 체력 훈련을 준비하지 않았다. 결국 해외로 오가는 일정이 몸을 축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년 7~8차례 해외를 나가는데 시차 적응도 문제고 귀국 후 인천공항에서 다시 김해공항까지 비행편을 이용해 집으로 가는 일정이 너무 벅찼습니다. 한 번 외유를 다녀오면 몸이 파김치가 될 정도였죠. 그러니 월드컵대회도 성적이 안 나고 국내도 부진한 상황이 반복되더라고요.”

데뷔 후 4연속 128강 ‘광탈’
“연습 루틴과 큐, 다 바꿨다”

프로당구 선수 최성원이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이혜영 기자)
프로당구 선수 최성원이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이혜영 기자)

해외 투어에 대한 부담이 커지면서 최성원은 새로운 동기 부여를 위해 PBA 진출을 결심했다. 승부사의 본 모습을 다시 보여주고 싶은 의욕을 불살랐다.

“사실 3년 전부터 끊임없이 PBA 측의 권유가 이어졌는데 올해 여러 사정이 맞물려 자연스럽게 프로 진출을 결정했죠. PBA 공인구도 직접 구매하고 연습을 시작했지만 오랜만에 하다 보니 몸이 따라주지 않아 힘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도 자신 있게 대회에 참가했는데 4개 대회 연속 1승도 거두지 못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나중에는 스트레스와 함께 ‘멘붕’(멘탈 붕괴) 상태에 빠지더라고요. 너무 준비 없이 성급하게 프로 선언을 했다는 후회도 했고요.”

최성원은 오만가지 상념이 겹쳤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는 오기로 버텼다.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라 자신이 풀어낼 문제였다.

“기존의 연습과 생활 루틴을 완전히 다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연맹 시절 시합 시간이나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깨닫고 밥 먹는 시간이나 휴식, 연습 시간 등의 기존 루틴을 새롭게 구축한 거죠. 큐도 여러 개를 바꾸다 최근 좀 맞는 큐를 찾았는데 첫 우승도 그래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신생팀 휴온스 소속으로 팀 리그를 경험한 점은 약 효과가 뛰어난 예방주사였다. 처음 치르는 팀 리그에 대한 부담과 압박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특히 주장을 맡아 팀 전체를 이끌 입장이 되자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팀 리그를 치르면서 1부 투어 압박감이 줄어든 건 확실합니다. 게다가 첫 우승할 때는 승운도 많이 따른 것이 사실이죠. 운이 뒷받침해 ‘꾸역승’을 이어 간 건데 그나마 결승에서 제대로 경기력이 나와서 다행이었죠.”

최성원은 당구를 배울 때 따로 스승이 없었다. 본인보다 잘 치는 사람이 모두 스승이었다. 다른 선수들의 공략 방법이 괜찮다 싶으면  될 때까지 따라 하면서 자신만의 공략법으로 체화시켰다. ‘독학’으로 세계 정상의 실력을 쌓아 올린 그만의 방식이다.

“앞으로의 꿈은 ‘최성원 선수가 최고’라는 말을 듣는 겁니다. 그러려면 최소한 1년에 한 차례씩 우승해야 하는데 열심히 해야죠. 그래서 나중에는 후진 양성을 위한 아카데미를 열어 보고 싶습니다. 4구, 1쿠션을 거쳐 당구의 원리를 이해한 다음 3쿠션을 시작해야 기본기가 탄탄해지거든요. 유럽 선수들은 어릴 때부터 1쿠션을 거쳐 3쿠션을 배워서 기본기가 강한 겁니다.”


정완주 기자 wjchung12@hankoo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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