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2세 가수, 장고·창 배우며 뿌리찾기

영혼을 노래하는 음유시인 이경미

재일동포 2세 가수, 장고·창 배우며 뿌리찾기

지난 7월 고국 땅에서 첫 개인 콘서트를 갖고 활동을 시작한 재일동포 2세 가수 이정미.

‘영혼을 노래하는 음유시인’이란 별명에 걸맞게 몇 차례의 TV 프로 출연과 단 한번의 공연만으로 그녀는 팬클럽까지 결성될 만큼 국내 가요팬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요즘 몸이 좀 아파요. 침을 잘 놓는다는 분이 서울에 있다 해서 침 맞으러 왔어요. 이참에 지방으로 여행도 가보려 합니다.”이정미는 침을 맞아 벌겋게 변한 목 주위 자국을 보여주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일본 전역 누비는 언더그라운드 가수

그녀는 총련과 민단으로 나뉜 재일동포 사회에서 민족 전통의 음악 정서를 지닌 통합가수로 불린다. TV나 라디오에 등장하는 일본 주류의 무대 가수도 아니건만 지난 한국공연 때도 50여명의 일본인 팬클럽 회원들이 따라왔다. 배타적인 일본 연예계에서 당당하게 한국 이름으로 활동하는 가수라는 것만으로도 눈길을 끌지만 자신의 노래를 원하는 곳이라면 오키나와부터 홋카이도까지 일본 전역을 누비는 언더그라운드 가수라는 것도 특이하다.

또 지난 3월까지는 밤에는 도쿄 도립 미나미 가쓰시카 야간고등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쳤고, 한때는 먹고 살기 위해 고층빌딩 유리를 닦기도 했다. 일본 구니타치 음대에서 성악을 전공했던 오페라 가수지망생이었다지만 대중가수로서는 은퇴를 고려할 나이인 35세에 데뷔해 10년간 무대에 섰다는 사실도 평범하지 않다.

일본 가쓰시카의 가난한 고물상 집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이정미는 아버지가 목이 터지게 부르는 ‘목포의 눈물’등 한국 노래를 들으며 자랐다. 현실 도피를 꿈꾸던 사춘기 시절, 운명처럼 다가온 피아노 선생님이 그녀에게 성악가를 권했다.

“고물상집 딸이라는 콤플렉스를 느끼고 자랐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피아노 선생님의 성악을 권유했는데, 오페라 가수가 되면 상류사회로 나갈 수 있겠구나 싶어 성악가가 되기로 했어요.”

학력을 인정하지 않는 조선학교를 나온 탓에 음대 입학이 불가능해 도립 미나미 가츠시카 고등학교를 다시 들어갔다. 그때 어머니가 투병 중이었지만 상류 사회에 대한 강한 집착은 어머니를 관심 밖으로 밀어냈다. 그러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죄의식을 느끼긴 했지만 음악대학(구니다치 음대) 입학이라는 자신의 꿈을 이뤄냈다.

대학 진학후 한국에서 광주사태가 일어났다. 끔찍한 현장을 TV로 보며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 구명 집회 등에 참석, ‘아침 이슬’등 한국 포크를 처음 접했다. 그 인연으로 86년 김민기 노래 13곡을 모은 카세트 음반 ‘김민기를 부른다’를 발간했지만 그녀의 가슴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가끔씩 주어지는 무대는 그저 부업 같은 것, 서른 살 때 남편과 이혼하고 세살 된 딸만 남았을 땐 노래를 포기했다. “고층 빌딩 유리를 닦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땀 흘리는 노동의 기쁨을 알게 됐어요. 때의 경험은 그전까지는 몰랐던 새로운 세계를 체험한 시간이었어요.”


서울공연땐 장사익ㆍ양희은 우정출연

그 시절 우연히 시인 야마오 산세이의 낭송으로 ‘기도’라는 시를 듣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과거과 현재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새로 시작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 때 부끄러워했던 자신의 뿌리를 찾고 싶은 마음에 장고와 창을 배웠다.

그렇게 나온 게 재일동포의 한과 자신의 소박한 꿈을 담은 데뷔음반 <나는 노래한다(わたしはうたう)>(97년)다. 舅슭?싱어송 라이터인 고무로 히토시가 가슴 시리게 하는 이 노래를 우연히 듣고 가수로 데뷔시켰다.

그녀는 96년부터 1년에 100회씩 모두 500회 이상의 공연을 했다. 팬들이 준비한 작은 마을이나 도시의 주민 회관, 교회, 절, 학교 공연이 대부분이지만 민들레 씨앗이 조금씩 바람에 날려 퍼지듯 그녀의 노래는 일본열도로 퍼져 나갔다.

고국 무대에 나타난 것은 2001년 제주도에서 열린 4·3 위령음악제, 그리고 5월 의정부에서 열린 원코리아 페스티벌였다. 언론은 슬픔에 찬 그녀의 삶과 노래를 지나치지 않았다. 드디어 지난 7월 첫 개인콘서트가 열리면서 사이버상에 300여명의 국내 팬클럽마저 생겨났다. 서울공연 때는 자신의 대표 곡인 ‘게이세이센’(京成線)과 도종환의 시에 곡을 붙인 ‘당신의 무덤 가에’, 김민기의 ‘아침 이슬’ 등 20여 곡을 불렀고 장사익, 양희은이 무료로 출연했다.

“고국 팬들의 반응은 상상도 못했어요. 공연에서 만나니 마음이 따뜻한 분들이라 편합니다. 일본도 겉으로는 한국인에 대한 편견, 차별이 강하지만 착하고 한국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두 나라의 사람들이 노래를 통해 진짜 한일 교류로 이뤘으면 좋겠어요.”

오랜 꿈이었던 고국 공연 후 그녀는 “성공으로 차별을 뛰어넘겠다는 꿈을 이룬 것은 아니지만 삶을 솔직하게 담은 노래를 통해 두 나라 사람들과 만날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한다. 전에는 한국과 일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 같은 이질감으로 괴로웠던 그녀는 이제 자신의 노래가 한국과 일본이란 두 고향을 잇는 다리가 되길 바라고 있다. 공연마다 한국 민요 두어곡을 일본인들에게 들려주고 서울공연 때 오키나와 등 일본의 토속 민요를 소개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녀의 노래는 멜로디는 발라드 쪽에, 가사는 포크에 가깝다. 노래를 들고 있으면 어릴 때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한국 대중가요와 민요, 일본 민요, 서양 음악이 한데 뒤섞인 국적이 모호한 음악 같기도 하다. 그 독특한 분위기는 대중이 그녀의 노래를 찾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팬클럽 결성, "한국어 음반 나왔으면"

그녀의 한국 팬클럽은 고교생부터 50세 중년층에 이르기까지 연령층의 폭이 넓다. 그러나 ‘보아’와 같은 ‘아이돌 가수’도 아닌 진지한 노래를 부르는 중년의 가수에게 선뜻 음반 제작을 제안하는 국내 메이저 음반사는 없다. 작은 음반사에서 관심을 표명했지만 그나마 제작 환경의 차이로 갈등을 겪는 중이다.

“음반 제작으로 돈을 벌 생각은 없어요. 일본에서는 정식 배급을 하지 않아도 음반이 팔리는 시장이 있지만 한국은 환경이 다르니 정식 취입을 할 수 있게 되길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그녀는 한국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할 생각은 없다. 주로 일본에서 활동하되 자신의 노래를 듣고 싶어하는 요청이 있으면 언제든 달려올 계획이다.

다가오는 추석 때 강남 봉은사에서 공연을 갖는다. 이정미는 “한국인이건 일본인이건 상관없이 같이 살고 있음이 행복하다는 것을 노래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어요. 의도적인 메시지보다는 그저 공감을 하고 싶을 뿐”이라고 소박하게 말한다. 그녀는 일본에서 해왔던 것처럼 한국에서도 자신의 노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아 다닐 생각이다.

글.사진/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글.사진/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