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패티 페이지 국내 최초 개인 리사이틀

[추억의 LP 여행] 패티김(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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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적인 외모와 시원한 목소리, 깔끔한 무대 매너, 몸 관리 등의 덕택으로 반 세기 가까이 카리스마의 가수로 군림해 온 패티김. 그녀는 '사랑하는 마리아', '서울의 찬가', '빛과 그림자', '모정', ‘이별’, ‘초우’ 등 이루 헤아리기 힘들만큼 히트곡을 양산해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초대형 가수였다.

94년 MBC 라디오에서 선정한 '가장 즐겨 듣는 한국가요 100곡'에는 '초우', '이별',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등 여자 가수로는 가장 많은 3곡이 선정되기도 했다.

그녀의 본명은 김혜자. 일본 명지대 출신의 엘리트였던 김인현씨와 숙대의 전신인 경성보육학교를 나온 차옥성씨 사이의 3남 5녀 중 여섯째로 1938년 1월 29일 서울 종로 인사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그녀는 잘 울지도 않고, 다른 아이들과 다투면 꼭 이겨야 직성이 풀렸던 야무진 성격이었다.

부친이 재혼하면서 어머니를 따라 혜화동으로 이사를 가 혜화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살았다. 또래에 비해 키가 커 나이보다 항상 숙성했던 그녀는 골목대장 노릇을 할 만큼 개구쟁이 이기도 했다. 눈이 가늘었던 그녀의 어릴적 별명은 '실죽이'. 종로 화신 뒤로 이사를 간 후로는 화신백화점이 놀이터였다.

이후 당시에는 시골이나 진배없었던 흑석동으로 이사를 갔다. 자연에 묻혀 산 이 시절을 두고, 그녀는 평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한다.

"당시 저녁식사가 끝난 후 식구 모두가 모여 항상 웃고 노래하며 놀았어요" 초등학교 시절 그녀의 학업 성적은 중간 정도였는데 음악과 체조에 재능을 보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둘째 오빠가 북한 의용군으로 끌려갔다 극적으로 돌아온 일, 1.4후퇴 때는 걸어서 평택 근처까지 가 기차 지붕 위에 올라 대구로 내려왔던 일 등 그 역시 6ㆍ25를 온몸으로 겪었다.

대구에 내려가서는 경북여고 정문 옆에 셋방을 얻어 정착했다. 형제들은 흩어지고 어머니와 세자매만 함께 살았다. 피난 중에 이화여중에 응시했지만 떨어져 2차였던 중앙여중에 입학했다. 전쟁이 끝난 중2 때 서울로 올라왔다. 이때부터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 가사를 외우며 열심히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도 노래만 불러 야단도 많이 맞았다.

그러나 큰 키 때문에 배구와 수영반원으로 활동해야 했다. 중앙여고 때는 키가 크고 숙성한 몸매에 비해 시력이 나빠 언제나 교실 맨 앞에 앉아서 공부를 했다. 여고시절 그녀는 순하고 노래 잘하는 아이로 통하며 교내 행사에서 두각을 나타낸 학교의 인기 가수였다. 당시 레퍼토리는 '산타루치아', '대니 보이' 등.

그러던 중 우연하게 국악특별활동반의 수업을 구경 하다 시조를 따라 읊는 그녀의 재능을 발견한 선생님의 권유로 6개월 동안 국립국악원에 다니기도 했다. 당시 그녀는 판소리 ‘심청전’을 반년만에 완창 해 주위의 놀라움을 샀다. 또한 덕성여대 주최 전국중고교 국악 콩쿠르에 참가해 단가 '운단풍경'을 불러 창부분 1위에 입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이었던 큰오빠의 반대로 국악을 그만 두어야 했다.

1958년 봄, 여고 졸업 직후 아나운서가 되려고 응시했지만 시력이 나빠 원고를 더듬더듬 잘못 읽어 버려 낙방했다. 당시 우연히 명동거리에서 큰오빠의 친구인 기타연주가 곽준용을 만난 것이 가요 가수의 길로 들어서는 첫걸음이었다. 며칠 후, 곽씨의 소개로 미8군의 프로덕션 화양에서 전무로 있던 김영순(베니 김)에게 오디션을 받았다.

눈이 휘둥그레진 베니 김은 자신의 '베니 쇼'에 신인 가수로 픽업을 했다. 첫 무대는 오산 미 공군 기지의 한 클럽. 첫 예명은 패티김 아닌 린다김이었다. 잔뜩 긴장을 하고 노래 한 곡을 끝냈더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당시의 레퍼토리는 'You Don't Know Me', '추억은 이렇게' 등 단 두 곡이었다. 이후 봉급도 없이 2개월 간의 견습기간을 보냈다.

린다김은 정기 오디션에서 스페셜 A등급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노래 연습에 몰두했다. 59년 3월, 3만환의 첫 봉급을 받았다. 자신의 힘으로 처음으로 돈을 벌었다는 마음에 의기양양했지만 큰오빠의 호통에 가출을 해야 했다. 예명을 바꾼 것은 당시. '패티 페이지만큼 유명해 지라'는 베니 김의 권유때문이었다.

그렇게 점차 가수로서 틀이 잡혀갔다. 하지만 1년 후 큰오빠의 엄명에 따라 은퇴 아닌 은퇴를 하고 잠시 활동을 접었다. 강제로 맞선까지 봤지만 1년을 참지 못하고 베니 김의 주선으로 1960년 초, 조선호텔 나이트클럽무대에 올라 '사랑의 맹세'와 '파드레'를 불러 주한외국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어느 날 당시 AFKN간부의 주선으로 일본 NET-TV로부터 공식 초청을 받았다. 당시는 한일국교정상화 이전. 이로써 패티 김은 '해방 이후 최초로 일본으로부터 정식 초청을 받은 가수'로 기록되었다. 월 3백달러의 캐런티를 받고 일본의 톱 클래스 악단 '스타 더스트'와 3개월 간 일본 전국 투어를 돌았다. 팝송은 물론, 한복 차림으로 장고를 메고 장고춤을 추며 '아리랑 목동', '도라지', '아리랑' 등을 노래했다.

반응이 대단해 도쿄 최고의 영화 촬영소였던 니치게키(日劇) 등지에서 7개월 동안 리사이틀 쇼를 갖다, 61년 5월에 귀국했다. 돌아 온 패티김은 반도극장에서 '일본에서 돌아온 패티김 귀국쇼'를 열었다. 이 무대는 국내 최초의 개인 리사이틀이기도 하다.

당시 귀국 무대에는 현인, 장세정, 박재란, 최초의 댄스가수 이금희, 15세의 소녀가수 윤복희 등이 우정 출연해 대성황을 이뤘다. 이 무대는 대중에게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린 계기 였을 뿐 아니라, 큰오빠의 마음을 돌리게 해 주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3-12-10 11:08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