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미술이야기] 영화 과 프란체스코 클레멘테트랜스 아방가르드 화풍으로 '인간을 둘러싼 양면성' 묘사

기억은 켜켜이 쌓이는 것이지만 추억은 기억의 정지화면이다. 그런 추억을 누가 아름답다고 했던가. 추억이란 가슴 저미는 순간이자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기에 더욱 아리다. 이런 추억 특히 소년소녀들이 성장기에 겪는 아픈 추억은 문학이나 연극의 좋은 소재가 되어 왔다.

찰스 디킨스(1812~1870)의 고전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은 시대를 1800년대에서 1980년으로, 장소를 영국에서 미국으로 바꾸어 1998년 영화화됐다. 물론 이 소설은 1946년 데이빗 린(1908~1991)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던 영화이다.

이후 멕시코 출신의 알폰소 쿠아론이 감독하고 ‘구름 속의 산책’의 촬영 감독 에마누엘 루베스키가 촬영을 맡아 그의 장기인 독특하게 빛의 대비를 포착함으로써 마치 눈부신 한편의 인상파 회화를 보는 듯 흩어지는 빛이 아름답다.

부모를 잃고 누나 메기와 누나의 애인 조와 함께 살아가는 핀 벨의 성장과정, 즉 화가로서 성공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에단 호크가 핀 역을, 그의 사랑 에스텔라역에 기네스 팰트로우가 그리고 로버트 드니로와 앤 밴크로프트가 조연으로 나오는 호화 캐스팅이다.

플로리다 해변가 작은 마을에 사는 핀 벨은 가난하지만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인 소년이다. 그래서 바닷가에 나가 파도와 갈매기를 모델로 그림을 그린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는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줄 탈옥수 루스티그를 만나 그의 발목에 찬 족쇄를 풀어주면서 인연은 시작된다.

무섭고 떨리면서도 누군가를 돕는다는 우월감은 그와 루스티크를 이어지는 끈이 된다. 그 후 소년과 탈옥수는 어색하고 경계하던 태도에서 서로 감싸주는 사이가 된다. 지루한 일상이 루스티그로 인해 깨어지자 그에게 또 다른 사건이 찾아온다. 우연히 낮선 소녀가 그를 스쳐간 것이다.

햇볕이 부서지 듯 내리쬐는 푸른 숲에서 말이다. 그녀는 마을에서 가장 부자인 노라의 조카딸이다. 그녀의 초청으로 다시 노라를 만나고 이후 에스텔라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사랑으로 그녀를 만나러 나선다.

하지만 에스텔라는 소녀들 특유의 새침과 오만으로 그를 대한다. 그리고 무관심한 척 냉대까지 한다. 그러나 이것은 에스텔라가 좋아하는 숨기려고 더 냉정하게 구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볕 좋은 날, 작은 중앙 분수대에서의 운명의 첫 키스를 갖게 된다.

조금은 에로틱하면서도 귀엽고 사랑스럽고 싱그러운 그런 장면으로 물을 먹는 핀에게 다가가 물을 마시는 척 하면서 에스텔라는 핀의 입술을 훔친다. 이런 돌발적인 상황에 핀은 당황하고. 하지만 이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쌀쌀하기만 하고 그러던 중 노라의 말대로 에스텔라는 갑자기 파리로 떠나고 핀은 절망에 빠진다.

그림조차 포기한 핀에게 어느 날 갑자기 익명의 후원자가 나타난다. 뉴욕으로 나간 그는 화가로서 꿈을 이루며 뉴욕 미술계의 신데렐라로 부상한다. 7년 후, 부와 지위, 명성을 손에 쥔 핀은 에스텔라와 뜻하지 않은 재회에 가슴 뛰지만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와 정혼 했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버린다.

(좌) 영화 '위대한 유산' 포스터 (우) 클레멘테 'Semi', 1978

그녀를 잡기위해 이룩한 부와 명예가 허사가 되고 에스텔라가 자신을 후원해 준 것이라 믿었던 핀은 절망한다. 취해서 집으로 돌아오던 핀은 ?기는 한사람을 구해주고 그가 탈옥수 루스티크임을 알게 된다. 루스티크는 핀에게 파리로 가자하고 핀은 겁에 질려 그를 피신시키려고 지하철을 타지만 루스티크는 괴한의 칼을 맞고 죽어가면서 어렸을 적 핀이 늘 지녔던 작은 스케치북을 꺼내 보여준다.

그제야 핀은 누가 자신을 후원해 줬는지 그리고 어떻게 성공한 화가가 될 수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면서 그가 누리는 위대한 유산의 의미를 알게 되고 영화는 종말을 향해 달려간다.

이 영화에서 그림은 매우 중요한 키워드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리고 성공한 화가가 되 는 과정에서 핀의 그림은 그의 성장을 보여주는 도구이자 상징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성장영화라 할 수 있는 이 영화에는 이탈리아 트랜스 아방가르드(Trans Avantgarde) 화가인 프란체스코 클레멘트(Francesco Clemente,1952~ )의 그림 200여 점이 나온다.

나폴리에서 태어나 뉴욕과 인도의 마드라스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그의 삶이 이 영화와 좀 닮아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의 영화와의 인연은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에서 최면술사로, 멕시코 영화 ‘도대체 훌리엣이 누구야?’(Quien Diablos Es Juliette?)에서 단역으로 출연만큼 깊다.

어린 시절 시를 쓰고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지만 접고 그림 그리는 일에 몰두했다. 그는 여행으로 다양한 문화를 경험했고 특히 인도의 사상과 종교, 철학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중세 신비주의와 이탈리아의 역사와 신회에서 소재를 구했다.

그의 주된 주제는 ‘인간의 육체’로 남과 여, 정신과 육체,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니라 분화되기 전인 하나의 세계였다. 그는 자신의 주제를 “나는 외부로 보여지는 것과 내부에서 느껴지는 것 사이의 매개자로서의 신체에 관심이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는 지금도 인도와 자메이카, 뉴멕시코, 히말라야 등을 돌며 명상하고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그가 속했던 ‘트랜스 아방가르드’는 1979년 이탈리아의 비평가 아킬레 보니토 올리바에 의해 주창된 화파로 16세기 매너리즘과 유사한 느낌을 갖게 하는데 필사적이지 않고 우화적이며 다소 산만한 느낌을 주는데 매혹, 신화, 외설스러운 것을 많이 다룬다. 이들은 뒤샹의 계보 속에 위치한 작품의 비물질화와 제작의 몰개성화에 맞서 회화의 전통 즉 ‘손에 의해 그려지는’ 그림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이었다.

여기에 참여한 화가들로는 클레멘테와 산드로 키아(Sandro Chia,1946~ ), 엔초 쿠키(Enzo Cucchi, 1949~ ) 후에 합류한 밈모 팔라디노(Mimmo Paladino,1948~ )등이 있다.

이런 회화로의 복귀현상은 1980년대를 상징하는 미술적 사건으로 독일에서는 신표현주의(Neo-Expressionism)라는 이름아래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 1945~ ), 바젤리츠(Georg Baselitz, 1938~ ), 뤼페르츠(Markus Lupertz,1941~ ), 펭크(A. R. Penck, 1939~ ) 임멘도르프( Jorg Immendorff,1945~ )등이 그리고 미국에서도 신 표현주의라는 기치아래 줄리앙 슈나벨(Julian Schnabel,1951~ ), 데이비드 살레(David Salle,1952~ ), 로버트 롱고(Robert Longo,1953~ ), 에릭 피슬(Eric Fischl,1948~ )등이 있다. 이러한 구상적 회화는 80년대 후반 포스트 모더니즘의 절정을 상징하는 미술로 자리했는데 이들의 영화에 대한 생각도 형상에 관한 지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글/ 정준모(미술비평, 문화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