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문학창작촌4개 동에 집필실, 미디어랩 등 마련 세대 장르 넘어 조용한 소통

박태원의 <천변풍경>(1936),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1965)을 비롯해 최근 김미월의 <서울 동굴가이드>(2007)까지 모두 서울을 배경으로 쓴 대표적인 문학작품이다. 이렇듯 공간은 작가에게 창작의 거점이 되는 곳이지만, 아쉽게도 서울에 작가를 위한 전문 공간이 전무했다.

5일 문을 여는 연희문학창작촌(이하 연희문학촌)은 이 점에서 단연 문학계의 화제로 떠올랐다. 서울시 아트팩토리(Art Factory)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올해 다섯 번째 들어서는 이 창작 공간은 공연과 미술에 중점을 둔 여타의 다른 창작 공간과 달리 문학에 집중 지원하는 형태다.

옛 서울시사편찬위원회 건물을 개조한 곳으로 문인만을 위한 창작공간이 도심 속에 생긴 것은 이번이 처음. 대지 6915m²에 연면적 1480m²의 이곳은 도심에서 보기 드문 전원형 창작 공간이다. 4개 동에 집필실 20개, 휴게실, 미디어랩 등이 마련됐고, 마당엔 산책로도 조성돼 있다.

서울에 문 연 첫 문학창작촌

'끌림', '홀림', '울림', '들림'이란 이름의 4개 문학동은 국내 작가용 집필실 17개, 해외 작가용 집필실 3개로 활용된다. 집필실은 침대와 옷장이 있는 생활공간과 책상, 책장이 있는 집필공간으로 나뉘고 샤워시설과 공동 거실, 주방이 각 동마다 배치돼 있다. 운동시설을 갖춘 '예술가 놀이터', '세미나실', '문학미디어랩실' 등은 각종 문학이벤트와 문화정보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으로 지역주민과 소통 공간으로 활용될 계획이다.

박범신 연희문학촌 집행위원장은 "문학창작은 집중력이 필요한 업무라 일상적 공간에서 창작하기 쉽지 않다. 여기서 쓴 작품이 노벨문학상 수상작이 될 수도 있고 실제 한 동을 활용해 해외 작가가 한국에 머물고 한국에 관한 문학작품을 쓰도록 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연희문학촌 측은 "세계적인 작가를 기획 초청해 국내 작가와의 교류를 지원하고, 창작과 연구활동을 통한 국제교류 네트워크를 구축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달 8일 독일의 안드레아스 글래저(Andreas Glaser, 44)가 첫 해외 입주작가로 한국을 방문한다.

연희문학촌의 최대 장점은 서울 도심에 위치해 지리적 접근성이 높다는 것. 국내 문인의 64%가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돼 있지만(월간 <현대문학> 2009년 1월호 문인주소록 기준), 작가들이 이용할 수 있는 창작공간은 강원도 원주시의 토지문화관과 강원 인제군 백담사 만해마을의 문인창작집필실 등 두 곳이었다. 최근 전업 작가들이 늘어나면서 출퇴근이나 일상생활을 병행하며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은 몇 년 전부터 논의돼 왔다.

이밖에도 작가와 함께 하는 정기낭독회, 문학심포지엄, 시민문예교실 등 타 장르,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소통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박범신 집행위원장은 "연희문학촌이 세대와 장르를 넘어 조용한 소통 역할을 하고 있다. 지역주민들과 함께 하는 문학행사 등 소수 정예로 소통하는 자리를 만들 계획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작가에겐 '나만의 방'이 필요하다

문인들을 위한 창작촌은 강원 원주시의 토지문화관과 강원 인제군 백담사 만해마을의 문인창작집필실 두 곳이 있다. 각각 2001년, 2004년 이후부터 한 해 40∼50여 명의 작가에게 3~4개월씩 창작공간을 제공해 왔다. 이곳은 집필실과 식사가 무료로 제공되고, 작가들은 창작에만 매진할 수 있어 이용한 문인들의 만족도가 높았고 성과도 많았다.

토지문화관과 만해마을에서 모두 작업을 했던 소설가 박범신 씨는 문학집필실이 창작력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그는 "창작촌에 들어가면 외부로 격리된 느낌 때문에 집중력이 굉장히 강해진다"며 "쓰고 싶은 욕망은 많은데 잘 되지 않을 때, 새 작품을 시작할 때, 혹은 한 편을 끝장내고 싶을 때 아주 좋은 곳"이라고 말한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연희문학촌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산문집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시집 <열애> 등을 만해마을 창작촌에서 완성했던 신달자 시인 역시 연희문학촌 레지던스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신 시인은 "집안일이나 처리해야 할 잡일 등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어 24시간 몽땅 내 시간이 된다는 것이 장점"이라며 "이곳은 시사편찬위원회 자리에 새롭게 생명을 불어 넣었다. 내 원고 2권도 방치된 채 있는데 이곳에서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토지문화관에서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를 썼던 은희경 소설가도 11월 연희문학촌에 입주한다.

입주 작가 인터뷰

일정기간 숙식을 해결하며 창작에 전념하는 레지던스 형태로 운영되는 연희문학촌에 현재 입주가 확정된 문인은 총 19명. 이시영, 신달자, 신용목 시인과 은희경, 권지예, 김남일, 백가흠, 이현수 소설가, 유은실, 김해등 아동문학가 등인데, 56명이 신청해 3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10월 초부터 연희문학촌으로 '이사'온 김경주 시인은 "여행을 좋아하다 보니 해외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서울에도 문학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항상 바랐다. 이곳에 오니 (긴장감에) 아침에도 더 일찍 일어나게 되는 것 같다. 공간은 상상력이 깨어나는 거점이다"고 말했다.

역시 10월 초부터 이곳에 작업실을 두게 된 김근 시인은 홍은동 집과 연희문학촌을 오가며 시를 쓰고 있다. 그동안 홍대 근처에 개인 작업실을 두고 작업했지만, 운영비용이 높고 작품에 몰입하기 어려워 작업실을 처분하던 참에 연희문학촌 입주가 확정돼 이곳에 짐을 풀게 된 것. "생활공간을 함께 쓰면 신경 쓰이지 않느냐"는 질문에 김 시인은 "이곳은 옆방에 누가 있는 줄 모를 정도로 조용하고 서로의 생활을 잘 알지 못한다. 창작에만 몰입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입주 3주차를 맞은 백가흠 소설가는 "조용한 환경이 창작에만 몰두하게 한다"며 "생활에 쫓겨 미루어 두었던 원고를 쓰려고 한다. 이번 겨울에 오랜 시간 붙잡고 있었던 첫 장편 소설을 마무리 짓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역시 10월 초 이곳에 짐을 푼 손홍규 소설가는 벌써 경장편 한 권을 마무리지어 출판사에 건넸다. 손 작가는 "장편 소설 집필은 한적하고 세속과 유리된 공간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서울 한 복판에서 집필공간을 얻을 수 있다면 막대한 정보를 다루어야 하는 장편소설 집필과 관련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 된다"고 말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