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실의 재현' 그 태생적 정체성 의도적으로 벗어나<칼의노래> 인간적 영웅, <황진이> 여성 영웅 등 새 미학 발견

김훈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 김인숙의 <소현>과 이문열의 <불멸>. 최근 몇 년간 주목받은 역사소설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인간적인 영웅과 여성 영웅의 등장, 영웅의 실패와 방황이 작품의 비장미를 배가시킨다는 점 등이다. 2000년대 역사소설은 이전 시대 역사소설과 분명 궤를 달리한다. 역사소설의 핵심인 영웅 역시 달라졌다.

영웅을 보는 달라진 시선, 역사소설의 변화를 보자.

미장센이 된 역사

이들 역사소설 속 영웅을 구경하기 전, 한 가지를 짚어두자. 2000년대 역사소설의 특징은 역사적 사실 재현에 서사의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문학평론가 고명철 씨(광운대 교양학부 교수)는 평론집 <뼈꽃이 피다>에서 "최근 역사 소설에서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은 어떤 인물의 개별적 진실이다"고 말한다.

김훈 '칼의 노래'
2000년대 이후 발표된 상당수의 역사소설은 이전 역사소설과 비교해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차별화된다. 김별아의 <미실>, 김훈의 <현의 노래>처럼 역사에 가려진 인물을 통해 개인의 눈에 비친 역사를 말하거나, 전경린의 <황진이>, 김훈의 <칼의 노래>처럼 이미 수없이 반복 재현된 인물들의 전형적인 삶을 위반하는 서사를 통해 역사적 인물을 새롭게 발견하는 두 가지 방식이다.

어떤 식이든 2000년대 역사소설은 역사적 사실의 재배치를 통한 역사의 거대심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자로 인간의 진실을 새롭게 인식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제 역사소설에서 역사적 사실은 소설의 판을 구성하는 절대변수가 아니라 종속변수가 된다.

김훈 소설가는 지난해 본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역사소설을 쓰겠다고 소설을 쓴 적이 없어요. 근데 사람들이 그걸 역사소설이라고 하더군요. 나의 생각은 역사를 소설로 쓰고 싶은 생각은 없었고, 역사를 소재로 끌어다 쓴 거예요."

이는 비단 작가 김훈만 생각은 아닌 듯하다. 2000년대 발표된 상당수의 역사소설에서 화자가 비중을 두는 것은 역사적 디테일이 아니라 인물에 관한 새로운 해석에 있다. 고명철 평론가는 같은 책에서 "역사소설의 주요 인물의 개별적 진실을 탐구하기 위해 역사는 후경(後景)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역사는 소설 속 인물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미장센에 불과하다"고 분석한다.

김훈 '남한산성'
이는 '현대의 전사(前史)란 관점에서 과거를 생생히 묘사함으로써 현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풍부히 하는 것'이라는 루카치의 역사소설론, 즉 근대적 의미의 역사소설 관점을 벗어난다.

한국의 역사소설은 '역사적 사실의 재현'이란 그 태생적 정체성을 의도적으로 벗어남으로써 새로운 미학을 발견했고, '원소스멀티유즈'에 더 없이 맞아떨어지는 문화콘텐츠라는 출판계 산업 논리와 맞물려 2000년대 이후 봇물처럼 쏟아졌다. 역사소설의 한 축을 이루는 영웅은 그러므로 마땅히,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영웅에 가려진 인간적 모습

시작은 <칼의 노래>라고 입을 모은다. 70~80년대 신문 연재소설의 시대가 지나고 역사소설의 인기가 사그라진 90년대를 지나 다시 역사소설의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은 2001년 김훈의 <칼의 노래>가 출간된 후였다.

주지하다시피 <칼의 노래> 속 이순신은 저 광화문에 세워진 이순신과 다른 인물이다.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은 그 예의 클리셰-왜군을 무찌른 불세출의 무장-가 부정되며 이 부정을 통해 다른 여타의 역사소설과 차별화를 이룬다. 그는 적장뿐 아니라 왕과 왕을 추종하는 무리 등 허깨비 같은 존재들과 고독하게 싸우는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이다. 역사는 세계로부터 자기소외를 적극화하고 있는 이순신의 내면을 위해 존재하는 역할에 머문다. 다시 말하지만 작가 김훈에게 역사란, 다만 인간의 내면을 보여주기 위한 미장센에 불과하다.

이문열 '불멸'
'인간적인 영웅의 발견'은 안중근의 일대기를 그린 이문열의 신작 <불멸>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에서 안중근은 민족의 영웅이 아닌, 순결한 청년, 가톨릭에 영향받은 우직한 애국자로 그려진다. 일례로 소설 속 안중근은 술집을 드나들면서 기생들에게 '그렇게 살지 말라'고 꾸짖는다. 이렇게 우직할 정도로 순진한 인물이 안중근이다. 지난 인터뷰에서 작가는 안중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굉장히 순결한 사람이에요. 잡것이 없는 순결한 사람. 그리고 아주 곧고. 어찌 보면 융통성 없고 우스꽝스러운데 그런 순직한 모습이 좋았고 또 한편으로는 가톨릭 영향이겠지만, 어떤 경건성이 있어요. 옳다면 이것만 보고 가요. 좌우를 안 돌아봐요. 얼마나 답답한 사람이에요?"

패배하는 자의 아름다움

대부분의 역사소설의 경우, 영웅이 등장하는 이유는 갈등과 승리가 주는 서사의 힘 때문일 것이다. 일반적 의미에서 영웅의 일대기, 영웅의 승리는 역사적 사실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어떤 미학적 아우라를 가진다. 서사와 캐릭터가 분명한 역사소설은 때문에 동어반복이라는 치명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쓰이고 읽힌다.

김훈의 <남한산성>은 과거의 찬란한 순간을 그린다는 역사소설의 통속적 공식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작가는 역사의 가장 참담한 시기, 굴욕의 장면을 미학적으로 승화시킨다. 이 소설은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에 갇힌 40일, 그 아비규환의 상황과 한 나라의 국왕이 오랑캐에게 이마를 찧어 나라를 구하는 치욕의 순간을 그린다. 그리고 작가 특유의 마성의 문체로 그 치욕이 인간 삶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임을, 그것을 견뎌내는 자가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준다.

김인숙 '소현'
동일한 시대를 그린 김인숙의 <소현> 역시 패배하는 자의 아름다움을 미학적 모태로 삼는다. 이 소설은 병자호란 이후 청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에 관한 이야기다. 소현과 볼모로 그를 끌고 간 청의 왕 도르곤이 동갑내기다. 소설에서는 소현이 주인공, 도르곤이 조연과 단역 사이쯤 위치한다. 작가는 "도르곤도 영웅이었고 소현도 영웅이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김인숙 작가는 이 소설 출간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의 나라 볼모로 생활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이 사람, 외교관으로 역할을 한 거거든요. 제가 보았을 때 소현의 영웅적인 면모는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도 본국에서도 적국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세월을 견뎌내는 것이죠. 그 견뎌냈다는 것 자체가 저는 영웅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 <소현>과 <리진> 등 최근 몇 년간 발표된 굵직한 역사소설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파국을 맞는다. '권선징악'이란 영웅소설의 공식을 깨진다.

여인이 달라진다

최근 역사소설의 경향 중 하나가 남성 영웅이 아닌 여성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는 점이다. 이경재 문학평론가는 평론집 <단독성의 박물관>에서 "2000년대 역사소설은 '수동적 남성 인물'과 '적극적 여성인물'을 형상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여성인물의 적극성은 주로 창녀나 기생으로 나타난다.

전경린 '황진이'
성장의 귀착점으로 성녀(성모)나 도학자(예술가)의 모습이 제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경린의 <황진이>, 황석영의 <심청>, 김별아의 <논개> 등이 대표적이다. 신경숙의 <리진>이나 김별아의 <미실> 역시 창녀나 기생은 아니지만, 빼어난 육체적 아름다움과 매력의 소유자로 이 성적 아름다움이 인물의 정체성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이 역사 속 여성들은 어떻게 적극적으로 자기 삶을 개척해 나갈까?

작가의 상상에 의해 재탄생한 <미실>의 주인공은 정치적 야망을 지닌 아름다운 여인이다. 여기서 '아름다움'은 중요하다. 그녀는 신라의 신국 건설이란 이상 실현을 위해 자신의 지적 자의식을 십분 발휘해 정염과 관능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황진이도 "미의 정치를 알고 있었고 극대화시킬 줄도 알았다."(전경린 <황진이> 2권 112페이지) 미실의 정염과 관능 못지않게 황진이 역시 조선의 사대부들과 관계를 맺으며 아름다움의 힘을 발산한다. 이들은 모두 여성으로서 미적 자의식을 자각하고 있고 '이 모든 일은 주체적으로 이루어진다.'

역사소설에서 남녀 인물을 성격화한 것이 2000년대에는 정반대로 그려지고 있다. 기존의 강한 여성들이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숨기거나 부정했던 것과 달리 이제 여성들은 성적 아이덴티티를 적극성의 매개로 쓰고 있다.

'주인공의 영웅적인 일생을 그린 소설. 내용은 권선징악, 사필귀정, 고진감래 등을 담고 있으며 사회의 비리를 척결하거나 요괴를 처치하는 것 등 다양하다.'

영웅소설에 대한 정의다. 이 말은 이제 다시 쓰여야 할 것이다. 소설의 정의를 역행하는 새로운 관점의 이야기들이 소설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

김별아 '미실'
소소한 역사, 대타자의 상실

최근 몇 년간 역사소설은 두 가지 큰 변화를 보였다. 하나는 지리적 공간의 확장이다. 황석영의 <심청>, 의 <> 등은 역사의 스케일을 한반도에서 중국, 멀리 멕시코까지 늘렸다. 의 <천년의 왕국>은 중세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의 눈에 비친 조선을 그린 장편이다. 지리적 공간의 확장, 그곳에서 바라보는 한반도와 한국인이 아닌 제 3자의 눈으로 보는 한반도는 역사적 진실은 하나가 아님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또 하나의 흐름은 거대 서사가 아닌 소소한 이야기가 늘었다는 점이다. 의 <>, 성석제의 <인간의 힘>,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 등 일련의 역사소설에서 주인공은 영웅이 아니다. 이들 작품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제각각이지만, 모두 하나의 공통점을 지닌다. 바로 모두 역사적 진실을 상정하고 객관적으로 재현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성석제의 <인간의 힘>은 가난한 시골 양반 채동구의 출세기를 그린다. 작가는 16세기 말에 태어나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으며 70평생을 산 채이항(극중 채동구)이란 실존인물을 기록한 <오봉선생실기>를 바탕으로 썼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채동구란 실제 인물의 삶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텍스트를 바탕에 두고, 채동구의 삶, 역사의 단일한 의미화에 대한 회의를 드러내는 데 있다. 1930년대 민생단 사건을 모티프로 쓴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는 작가의 역사관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작품에서는 핵심인물인 박길룡이 민생단인지 아닌지, 여주인공 정희가 자살한 이유와 그녀가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은 누구인지 등 서사를 밀고 가는 질문에 대한 답은 끝끝내 알려지지 않는다. 삶과 역사의 우연과 불확실성, 혼돈만이 씨줄과 날줄로 엮인다.

신경숙 '리진'
이경재 평론가는 평론집 <단독성의 박물관>에서 "이런 특징은 상징계적 효력의 소멸과 대타자의 부재라는 2000년대의 상황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대타자가 붕괴된 상황 속에 처한 현대인의 곤경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여러 가지 삶의 방식들을 에둘러서 말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영하
검은 꽃
김경욱
'천년의 왕국'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