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장직 조선시대 1133명, 도덕성 갖춰야 하는 요직 현실에 반면교사
그는 청렴하고 겸공해 훗날 재상의 자손이 변변치 못한 신세가 되었어도 예의를 갖췄고 글을 올려 사실을 고백하고 자기의 벼슬을 주인집 아들에게 돌려달라 했다. 이에 나라에서는 기특히 여겨 주인집 아들에게 사옹원 별좌라는 관직을 주고, 그의 관직도 그대로 두었다.
사육신 성삼문의 증조부인 성석린(成石璘)은 '함흥차사' 일화로 유명하다. 제1차 왕자의 난이 있은 뒤 태조가 함흥으로 행차하여 머물렀는데, 태종이 여러 사자를 보냈으나 문안이 전달되지 않자 성석린이 태조와 옛 친구라 자칭하며 나섰다.
태조가 그를 반기며 "너도 네 임금을 위해 나를 달래러 온 것이냐" 하니 그는 "신이 만약 그래서 왔다면 신의 자손들이 대대로 눈이 멀 것입니다"고 하였다. 결국 태조는 환궁했으나 성석린의 장남 지도와 장손 구수, 그리고 구수의 아들이 태중에서부터 장님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최근 출간된 <한성판윤열전(漢城判尹列傳)>(려경)에 수록된 인물과 일화다. 한성판윤열전은 조선왕조 500년 간 오늘날 서울특별시장에 해당하는 한성판윤을 지낸 인물들의 자료를 집대성한 책으로 중문학자인 에 의해 완성됐다. 책에 따르면 반석평은 222대, 성석린은 초대 한성판윤을 역임했다.
는 "최근 관료 후보의 도덕성이 문제되고 공무원 사회에 정의가 강하게 요구되는 현실에서 한성판윤열전은 기록서를 넘어 현대인, 특히 공무원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내용을 다수 수록하고 있다"고 말했다.
책에 기록된 한성판윤의 대수는 1930대이고, 인원은 1133명이다. 이들 중에는 우리 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거나 널리 알려진 일화 속 인물이 적지 않다.
조선왕조를 통해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받는 황희(40대)를 비롯,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우고 이항복과의 일화로 잘 알려진 한음 이덕형(314대),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792대), 정조 치세의 공을 세운 채제공(878대), 문신이면서 서화에 능한 강세황(961대),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개화사상가인 박규수(1509대), 을사조약에 자결로 항거한 민영환(1860대), 종두법을 시행한 의학자이자 국어학자인 지석영(1879대) 등이다.
조선시대 서울 한성부 수장의 명칭은, 처음에는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약칭 판부사(判府事)라 부르다가, 후에 한성판윤‧한성부윤 등으로 명칭이 바뀌어 사용되어 왔다.
서울시에서 간행한 <서울行政史> 부록을 비롯해 1990년 원영환 교수가 지은 <朝鮮時代 漢城府硏究> 부록, 1997년 서울시 박물관에 전시한 도록 <한성판윤전>, 그리고 <서울市史> 부록에 한성판윤의 명단이 정리되었다..
는 개인 연구자료와 이들 명단을 종합 검토하고 <조선왕조실록> 등의 각종 사서와 대조해 다시 대수를 정리하고, 각종 문헌을 뒤져 약전을 기술, 4년여의 각고 끝에 약 1800 페이지 분량의 방대한 역저를 냈다.
이 박사의 <한성판윤열전>은 기존의 명단 기록들과 차별화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게 특징이다. 우선 성명(또는 이명, 별명)·생졸·연령·본관 외에 자(字)·호(號)·시호(諡號)·사조(四祖)·처부(妻父)·과거·관직 등을 상세하게 기술하였고 각종 과거 시험의 명칭과 등수까지 기록했다.
가령 이덕형은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에 을과 1등으로 급제하였고, 박문수는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병과 16등으로 급제하였으며, 민영환은 1877년(고종 14) 동몽교관이 된 후 이듬해 정시무과에 병과 9등으로 급제하였다.
한성판윤 1133명을 성씨별로 분류하면 전주 이씨가 84명으로 가장 많고 안동 김씨가 41명, 연안 이씨 37명, 대구(달성) 서씨 33명, 여흥 민씨와 풍양 조씨가 각각 31명으로 뒤를 잇는다. 전체적으로 56개 성(姓), 154본(本)으로 1000여 명 정도가 인적 사항이 파악된다.
한성판윤의 근무일수를 보면 1일부터 10일 간 짧게 근무하거나 5~6년 넘게 장수한 경우 등 다양한데 평균 근무일수는 대략 4개월 정도이다.
한성판윤은 정2품직으로 6판서와 좌우참찬과도 같은 품계로 9관(官)에 속한다. 한성판윤은 조선왕조의 핵심 요직으로 조선 역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창이며 오늘의 역사를 반추할 수 있는 매개이다. <한성판윤열전>이 오늘날 주목받고 있는 이유이자 가치이다.
■ 한성판윤 명칭 변경사
이 한성판윤은 계속 이어지다가 1894년(고종 31) 한성부윤으로 되었고, 이듬해 한성관찰사로 바뀌었다. 한성관찰사로 4대를 지내고, 1896년(건양 1) 다시 한성판윤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 후 1905년(광무 9)에 한성부윤으로 바뀌고, 1910년 한일강제병합 후에는 총독정치하에 경성부윤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 한성판윤 근무일수는 조선시대 1133명 한성판윤 중에는 1일부터 10일간 근무한 자가 93명이나 된다. 송순(300대), 민경호(1825대)는 단 하루 근무했고, 181대 한형윤 하루만 근무했으나, 186•189•205대를 더 근무했다. 1046대 이병정도 하루를 근무했으나 나중에 1065대와 1093대 한성판윤을 더 지냈다. 김사목은 2회(1072•1119대) 한성판윤을 지냈으나 17일을 근무했고, 이건하는 3회(1776•1840•1843대) 한성판윤을 지냈으나 근무일이 35일에 불과하는 등 여러 차례 한성판윤을 지냈으나 근무일자를 합쳐도 한 달 내외 되는 사람이 여럿이다.
반면 판윤 횟수를 가장 오래 한 사람은 543대 이언강으로 11회를 역임했으나 근무연수는 총합 2년 5개월이고, 다음이 400대 이완이 10회를 연임했는데 햇수는 2년반, 1315대 이가우가 9회 역임했는데 도합 1년 1개월, 997대 김문순은 9회 1년 반을 근무했다. |
<한성판윤열전> 전자
<한성판윤열전>을 펴낸 는 서울대 문리대 중문과와 대학원을 졸업(문학박사)하고 연세대에서 교수를 지냈다. 저서로 <공자>, <회남자>, <난중일기>, <한국도교사상사>, <전주이씨과거급제자총람> 등 수십 권을 냈고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문화이사를 역임했다. <한성판윤열전>을 집필하게된 계기는 2005년 <전주이씨과거급제자총람>을 출간하고 이어 <전주이씨열전>이란 제목으로 약 1천 명의 전주이씨 출신 역대 인명 사전을 거의 저술해 놓았는데, 가까운 분들이 국민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한성판윤열전>부터 출간하자며, 각종 자료를 가져다 주어 집필하게 됐다.
역대 한성판윤 명단을 조선왕조실록 등의 각종 사서들과 비교해보니 많은 출입(出入)이 있어 다시 대수를 정리하고 약전을 기술하였다. 기존서들과 비교해 그래도 실제와 가장 근접하지 않나 생각한다. 한성판윤과 현재 서울시장의 위상, 역할을 비교한다면 한성판윤은 경관직(京官職)으로 요사이 서울시장이 국무위원이 되어 국무회의에 참석하듯이, 당시 한성판윤도 매일 편전에 모여 대신들과 국정을 논의하는 상참(常參)에 참석하였다. 늘 왕과 같이 있게 돼 다른 직으로 교체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시정보다는 국정을 다뤘으며 한성부의 행정업무는 부시장격인 한성부 좌윤•우윤에서 맡았다. <한성판윤열전>에 의하면 한성판윤이 1930대 1133명에 이르는데 시기별, 구성별 특징이나 차이가 있다면
최근 각료 임명과 관련 도덕성 문제로 낙마한 경우와 장관 자녀의 특혜 채용이 사회 이슈화됐는데 <한성판윤열전>에 비춰 교훈이 될만한 말씀을 전한다면 역사가 중요한 것은 오늘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한성판윤이라는 고위직에 오르기까지 여러 관직을 거치는 것은 물론 청렴하고 귀감이 되는 처신을 해야 한다. 또 기강이 바로 선 시대에는 비리가 발붙이지 못한다. 음서 같은 특혜는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확산됐다. 공무원의 자세는 예나 지금이나 중요하다. 요즘 세대는 족보를 등한시하는 것은 물론 고리타분한 유물로 여기는데 현대에서 족보의 가치, 또는 의미를 든다면 몸에 비유해 역사가 뼈대라면 족보는 살과 피(혈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족보는 자신의 존재성이 역사라는 시공에 기록된 자취이다. 족보를 무시하는 것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서양에도 족보가 있고 식자층일수록 족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