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전승기념과 히틀러


“세계는 엄청 나게 변했다.”

미국을 비롯한 한 주간의 세계 언론을 비평하는 워싱턴 포스트의 ‘미디어 노트’라는 지면을 담당하고 있는 하워드 커츠는 5월 9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2차 세계대전 승리 60주년 기념 퍼레이드 뉴스를 보고 이렇게 요약했다. 미국과 러시아 정상이 만났는데도 뉴욕타임스는 A-10면, 워싱턴포스트는 A-17, 18면에 기사와 사진만을 실었기 때문이었다.

후르시초프, 브레즈네프, 고르바초프가 만약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면 어떠했을까. 커츠는 세계 미디어의 흥분이 잦아 든 것은 냉전이 식었기 때문이 아니라고 봤다. 그건 미디어들이 냉전이후에도 부시와 푸틴 대통령이 벌이는 모든 면에서의 경쟁에 초점을 맞추지 화합이나 동맹은 톱뉴스가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썼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는 부시가 라트비아에서 “스탈린의 동유럽 지배는 역사상 최대 과오 중 하나” 라며 얄타회담에 대해 부정적 발언을 한 것을 5월8일자 A-1면에 실었다. 반면 2일 후 푸틴이 “러시아와 독일간 역사적 화해는 유럽에서 이룩한 가장 가치 있는 업적이다”라고 말한 기념사는 두 신문의 A-1면에는 없었다.

물론 유럽의 전쟁이 끝나 가는 1945년 4월16~4월30일 사이 이 전쟁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의 ‘마지막 순간’을 다룬 특집도 그에 대한 비평도 세계 미디어에는 찾기 힘들었다.

왜 ‘어제’를 잊어버린 채 ‘어제’를 기념하는 것으로만 ‘오늘’에는 비치는 것일까. 커츠의 분석대로 미디어들이 자유, 민주주의 확산이나 국가체제 고수, 반미나 친미 경쟁에만 치우치기 때문일까.

그 해답을 4월12일께 번역 되어 나온 요하힘 페스트의 ‘히틀러 최후의 14일’과 5월10일 나온 트라우들 융에의 ‘히틀러-여비서와 함께한 3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요하힘 페스트는 1973년에 발간된 ‘히틀러 평전’(1997년 번역) 덕에 세계적으로 객관적인 히틀러 연구 언론역사학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1973~93년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너 자이퉁’의 발행인, 편집자 등을 지냈다.

트라우들 융에(1920~2002년)는 1942년11월, 22세의 나이에 히틀러 연설문 속기사, 타이피스트에서 1945년 5월2일 히틀러의 ‘벙커’를 나오기까지 비서 노릇을 한 나치당원 이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61세에 은퇴한 언론인이라고 했지만 역사를 쓴 언론인은 아니다. 그녀가 쓴 ‘히틀러’는 히틀러와의 만남을 회고한 회상록이며 넓은 의미의 3년간 히틀러를 친구며 아버지처럼 따르게 된 인연이 수백만 명을 살해한 사람을 아무런 회의 없이 복속하게 된데 대한 참회록이다.

융에는 히틀러의 나는 혁명 탄생지인 뮌헨의 상업고등학교 출신으로 나치이념의 열렬한 지지자는 아니었다. 그녀를 본 이들은 히틀러가 45년 4월30일 자살하기 직전 결혼한 에바 브라운과 모습이 비슷하다고 했다.

그녀는 43년 6월께 히틀러 당번병이며 전속 부관인 한스 융에와 결혼했다.

그때 그녀는 히틀러에게 왜 에바 브라운과 결혼하지 않는가를 물었다.

히틀러는 대답했다. “나는 좋은 가장이 될 수 없을 것이오. 아내에게 충분히 마음을 주지 못할 것을 알면서 가정을 꾸리려 한다면 그것은 정말 무책임한 행동일 게요. 그리고 난 자식도 원하지 않고, 천재의 자식에게는 세상살이가 힘들 것이요. 사람들은 후대에게 선조의 모습 그대로를 기대하지, 그들이 평범하게 살아가면 용서하지 않는다오. 게다가 천재의 자식들은 대부분 백치거든.”

나이 어린 융에에게도 이때의 히틀러는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힌 것으로 비쳤다.

특히 1944년 7월20일께 노르망디에 연합국이 상륙한 후 위기 속에 동부사령부 회의실에서 히틀러에 대한 폭발물 암살기도가 있었다. 이때 융에는 히틀러가 폭발 충격으로 바지가 야자 잎으로 만든 치마처럼 너덜너덜 해진 것을 봤다.

이런 모습을 한 히틀러는 고함쳤다. “어서 오시오. 정말로 운이 좋았소. 이게 다 운명이 내 사명을 정해 놓았다는 증거가 아니겠소. 안 그랬다면 나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일거요.” 그는 신은 믿지 않았지만 하늘이 내린 사명인 소명은 믿는 과대 망상증 환자였다.

이에 대해 요하임 페스트는 1,408쪽 ‘히틀러 평전’에 이어 271쪽의 ‘최후의 14일’에서 1945년4월16일부터 4월30일까지의 히틀러 최후를 역사학, 사회학과 언론인의 입장에서 분석했다.

4월16일은 소비에트 적군이 20개 대군단, 4,000대 이상의 유탄 발사기를 쏘며 동쪽에서 오데르 강을 건너기 시작한 날이다. 4월30일은 융에를 비롯한 20여명의 장군, 비서만을 남겨두고 히틀러가 이틀 전 결혼한 브라운과 함께 청산가리를 먹고 히틀러는 권총으로 머리를 쏴 자살한 날이다.

페스트는 히틀러가 베를린 벙커에서 자살을 택한 것은 바로 독일에 대한 ‘소명’을 누구보다 자신이 실천해야 한다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라며 다음과 같이 결론을 냈다.

“히틀러는 역사상 전례가 없는 자기 중심적 사유로 국가의 존립을 자신의 삶의 시간과 동일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불타는 땅’ 작전은 3월19일부터 죽을 때까지 내려 전(全) 독일을 어느 다른 종족, 나라에 주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의 군수장관이었던 알베르트 스페어는 그를 평했다. “그는 정치판에 뛰어든 노름꾼이다. 그는 모든 것을 걸었다가 잃었다. 그가 노름꾼이라는 사실 빼고는 그 뒷편에 아무것도 없다.”

페스트는 여기에 덧붙였다. “히틀러는 거대한 허무 속으로 사라지는 이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실패한 노름꾼이다. 남긴 것은 거대한 잡동사니 뿐이다.” 부시나 푸틴은 전승기념일도 마쳤으니 60년 전 히틀러를 되살려 봐야 한다.

입력시간 : 2005-05-18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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