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접으며] 못 믿을 세상


며칠 전 만난 한 보안업체 사장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만큼 통신비밀을 보장하고 있는 나라는 없습니다.” 궁금해서 왜 그런지 이유를 물었다. “통신비밀보호법에서 도청기 제조, 판매는 물론이고 소지하고 있는 사람까지 처벌하도록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죠.” 법으로 도청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얘기였다.

법률을 찾아보니 실제로 그랬다. 이를 위반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이 내려진다고 적혀 있었다. 물론, 테러 등 안보 문제와 관련해 국가기관에 의한 합법적인 감청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행해지고 있다.

법 조문만 본다면 세계최고의 통신보안을 보장하고 있다는 그 사장의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실상은 어떤가. 아내와 남편, 동업자 끼리도 엿듣고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하고, 도청하다 적발된 사람들조차도 죄를 뉘우치기 보다는 ‘재수없어 걸렸다’며 억울해 하는 상황이다. 통신비밀보호법은 그야말로 허울 좋은 허수아비, 사법(死法)이다. 이 덕분에 도청전파가 온 나라를 뒤덮고 있는 상황이다.

누워 있던 통신비밀보호법만 도청 만연 현상을 방기한 것은 아니다. 정부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보안업계에서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오던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방식의 휴대폰 도청 문제와 관련, 가능성을 완강히 부인하던 국가정보원과 정보통신부가 8월 5일 ‘휴대폰도 도청 가능하다’고 털어놓은 것을 보면 그렇다. 그간 그들이 그걸 몰라서 부인했다고 보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죽은 시늉하며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통신비밀보호법 보다, 옳은 말을 해도 틀렸다고 우기던 국정원에서 느끼는 배신감이 더 크다.

사정이 이러하니, 천하에 못 믿을 정부를 도청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인공위성도 만들어 쏟아 올릴 수 있다는 청계천, 세운상가 업자들이 합심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정민승 기자


입력시간 : 2005-08-11 14:17


정민승 기자 msj@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