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뮌스터대학에서 사회학과 사회철학을 강의하고 있는 송두율 교수(1944년생)가 지난 4월 10일 자신의 11번째 책인 <미완의 귀향과 그 이후(이하 미완의 귀향)>를 냈다.

37년 만에 독일 국적을 갖고 2003년 9월 22일 귀국한 그는 9개월여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서울구치소에서 보낸 후 이듬해 8월 5일 독일로 돌아갔다.

송 교수의 312쪽짜리 <미완의 귀향> 마지막 문단은 당시 법조를 출입하던 한국일보 이진희 기자가 쓴 ‘2004 인물: 재독학자 송두율 씨’의 기사로 끝난다.

“결국 항소심 재판부 판단은 1심과 달랐다. 송 교수의 저술활동을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 활동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으며, 북한을 다녀왔다는 단순한 사실에 대해서만 국보법의 잠입·탈출죄를 인정했다. 그러나 상처가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간첩죄가 아닌 국보법 위반죄임에도 수사 과정에서 ‘거물 간첩’이라는 타이틀로 폭로되고, 국보법의 모호성에 힘입어 행적은 왜곡되고, 살아온 정체성을 부정하라는 반성과 전향 요구에 개인의 정신은 짓눌렸다. 송 교수 사건은 냉전 이후 고착된 우리 사회의 이념갈등과 여기에 뿌리를 두고 때만 되면 터져나오는 ‘집단적 가학성’의 실체를 남김 없이 보여준 사건이었다.”

1967년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서독에 유학한 송 교수는 72년 서슬 퍼른 유신헌법이 공포되자 74년 재독 반유신단체인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결성, 초대 의장을 맡았다. 그는 박정희 정부에 의해 ‘반정부 인사’로 분류되어 입국이 금지됐다.

송 교수는 37년 만에 고국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국정원의 신문을 받고 구속되어 이듬해 2004년 7월 21일 2심 판결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해 8월 5일 독일로 돌아왔을 때 송 교수를 위해 탄원에 나섰던 그의 박사학위 논문 지도교수며 후견인인 위르겐 하버마스, 노벨문학상 수상자 퀸터 그라스 등 사회인사 920여 명은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그는 간단히 대답했다. “썩은 내 나는 신문들 때문이다.”

그는 2004년 6월 30일 항소심 최후 진술에서 이런 말을 했다. “또 ‘악법도 법이다’라고 소크라테스를 인용하면서 저에게 국가보안법을 인정하라고 야단치는 이 나라 ‘중견 언론인’의 주장도 저의 귀에까지 들렸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든 것은 악법을 법으로서 인정한 패배자의 행위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동시대인에게 진정한 법이 어떤 것이어야만 하는가를 보여주었고, 이를 통해서 실천적 지혜로 그들을 인도한 분명한 승리자였습니다. 국가보안법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조금만 고민한다면 국가보안법을 소크라테스의 행위 동기에 견강부회식으로 가져다 붙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주간한국에 ‘어제와 오늘’의 칼럼을 쓰는 필자도 송 교수의 재판이 진행 중이던 때 10월 10일자 ‘송두율 교수와 나’ 등 그에 관한 5편의 글을 썼다.

필자는 이미 91년 6월 18일자 한국일보 ‘남과 북’ 칼럼에서 ‘주체 철학자’라는 제목으로 “북한을 편애, 편중하는 것이 주체철학자인가”라고 도발적인 의문을 던졌다.

송 교수는 73년 입북을 시작으로 91년 5월에는 김일성 주석과 만나 요담을 했다. 이 칼럼이 나간 후 송 교수는 91년 펴낸 <전환기의 세계와 민족 지성> 책의 ‘서글픈 이야기’라는 대목에서 필자를 ‘중견 언론인’으로 지목했다.

“나를 놀라고 또 슬프게 하는 것은 설사 ‘제도 언론’이라 할지라도 소위 논설위원까지 지냈다는 중견 언론인의 세계 인식의 수준과 양식이었다. 그가 결론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어느 쪽’이라는 표현은 그의 ‘남과 북’이라는 컬럼 제목과도 걸맞지 않기 때문에 이는 앞으로 ‘남이냐 북이냐’로 게재되어야 마땅한 것 같다.”

다행스러운 것일까, 요행일까. 이미 94년 3월에 한국일보를 떠나 지금은 언론인이라는 직함으로 ‘어제와 오늘’의 필자인 나는 <미향의 귀향>에는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 현재 경제부에서 근무하는 한국일보 이진희 기자의 덕을 본 것일까.

송 교수는 <미완의 귀향>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썼다. 그중 가슴과 눈과 머리에 와닿는 대목이 있었다. 제목은 ‘일구(一句)의 모색’이다.

“선문답에서 일구(一句)는 가장 중요한 한마디를 뜻하며 만약 우리가 그것에 집착하다보면 어느새 늙어버린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 분단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민족적 ‘일구’는 하나의 업보가 아니겠는가. 일본과는 다른 맥락이지만 (80년대 이른바 사회 원로들이 간담회에서 일본 사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 이념은 ‘아름다움’으로 일구화했다) 필자의 일구는 ‘아름다움’이다. 우리 모두 일상생활에 쫓기지만 각자가 한번쯤은 민족의 미래에 관한 진정한 ‘일구’가 무엇일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는 여유를 가졌으면 한다.”

이런 ‘아름다움’의 원천은 어디에 있을까?

2004년 6월 30일 항소심 최후진술에 답이 있다. “또다시 강조하지만 복잡하게 얽힌 동북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바로 한반도 통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달렸습니다. 남북의 상생과 평화를 구현시키는 그러한 ‘아름다운’ 통일은 동북아의 안정과 번영, 나아가 날로 좁아지는 지구촌의 미래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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