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기록하고 있다 (2)

판옵티콘(panopticon)에 대해서 설명할 때면 학생들에게 눈을 감아보라고 한다.

그리고 “실눈을 뜨다가 걸리는 사람은 한 시간 내내 서서 수업을 받도록 하겠다.”고 거짓 으름장을 놓는다. 일 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몇 녀석들이 실눈을 뜨면서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다. 나는 약속한대로 걸린 학생들을 일으켜 세우고, 몇 분을 더 지켜본다.

사실 이런 방식의 통제는 누구나 초등학교 때부터 경험하기 때문에 그 작동원리에 대해서는 간단하게만 언급하고 넘어가자. 학생들이 눈을 뜨지 않는 이유는 명백하다.

감시자인 선생이 자신을 보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실눈을 떴을 때, 선생이 자신을 보고 있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약속된 처벌을 받아야 한다.

더구나 옆 사람과의 소통은 단절된다. 보통 시끄러운 교실을 평정하기 위해서 교사들이 “눈감아!”라고 소리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눈감고 있기’는 변형된 판옵티콘이다.

영국의 공리주의자 벤담은 1791년 죄수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판옵티콘을 설계했다.

여기서 ‘효율적’이란 소수의 교도관이 다수의 죄수를 관리할 수 있다는 의미다. 어떻게 하면 이게 가능할까? 어쩌면 벤담은 어린 시절 자신이 받았던 통제를 떠올리며 아래와 같은 원형감옥을 설계했는지도 모른다.

보다시피 죄수들은 벽 주위를 둘러싼 감방 안에 들어가고, 교도관들은 건물 중앙의 감시탑에 자리한다.

모든 죄수들이 눈을 감고 있는 효과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 감방은 밝게 조명을 밝히고, 감시탑은 최대한 어둡게 해서 죄수들이 감시탑에 교도관이 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없도록 하면 된다.

이제 죄수들은 수업 시간의 학생들과 똑같은 처지가 된다. 죄수들은 불편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합리적인 해결책을 마련한다. 감시탑의 교도관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간에 감시탑에는 항상 교도관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판옵티콘에서 감시자의 존재는 불투명한 반면, 피감시자는 투명하게 드러난다.

감시자는 피감시자를 볼 수 있는데, 피감시자는 감시자를 볼 수 없다. 이를 ‘시선의 비대칭성’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감시의 시선에 일방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시선의 비대칭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수 있다.

‘시선의 비대칭성’은 죄수들로 하여금 감시를 내면화하도록 만든다. 즉 ‘난 언제나 감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거다. 이게 심해지면, 십 수 년 전, 모 방송국 9시 뉴스에 급작스럽게 출현해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라고 외쳤던 강박증 사람처럼 될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판옵티콘적인 감시모델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감시하도록 만든다. 이 때, 자아는 감시하는 나와 감시당하는 나로 철저히 분리된다. 내면화된 타인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감시하기.

이렇게 보면, 시선(視線)이란 일종의 무기다. 어떤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만으로 불안, 두려움, 공포를 느끼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은 늘 심리적 불편함을 불러일으킨다.

화살이나 총탄이 물리적 외상을 남기기 때문에 위협적인 것처럼, 시선은 우리의 내면을 공격한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우리를 집요하게 쳐다볼 때, 어떤 느낌이 들 것 같은가? 성질 더러운 사람들은 대번 이렇게 말할 거다.

“뭘 야려?” 카메라에 찍히는 것을 싫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누가 총알을 맞고 싶겠는가?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건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비슷하다. 대상을 포착하고 쏜다(shoot!).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감시권력은 국가에 의해서 독점되었다.

영화 『메트릭스』에 등장하는 ‘스미스 요원’처럼 안기부의 요원들은 쥐새끼들처럼 이 사회의 ‘불순분자’들을 감시하고, 도청했다. 그

래서 조지오웰의『1984』에 등장하는 ‘빅 브라더(Big Brother)’는 전체주의적 국가권력과 동일시되곤 했다. 그러나 민주화의 진행과 함께 국가 권력은 예전과 같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없게 되었으며, 오히려 다수의 시민들이 국가 권력을 감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다.

소수가 다수를 감시했던 판옵티콘적인 일방적 감시가 소수와 다수가 서로 감시하는 시놉티콘(synopiticon)적인 감시로 변모한 것이다. 이는 소수가 다수를 감시하는 파놉티콘이 근대 사회의 감시 원리로 자리 잡았던 19세기 동안(물론 유럽의 이야기다), 다수가 소수의 권력자를 감시할 수 있는 언론과 통신 기술의 발달로 가능해졌다.

이제 동시에 본다(Syn +opticon). 이는 일종의 역(逆)판옵티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순진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여전히 국가는 엄청난 양의 개인정보를 수집할 수 있으며, 다수 시민들이 국가 권력을 감시할 수 있는 수단은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제 국가가 독점했던 감시는 정보통신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기업으로 이전되고 있다. 예전의 감시가 정치적 이유에서 이루어졌다면, 오늘날의 감시는 기업의 이윤추구라는 목적을 위해서 진행된다.

‘전자/정보 판옵티콘’에서는 사람에 대한 정보 수집, 직접적 통제와 규율이 하나로 합쳐진다. 시선권력은 정보권력으로 확장된다. 작업장에서 노동자들을 통제하고 이들에게 규율을 강제한 메커니즘은 시선에서 정보로 진화한다.

직원들의 행동 하나 하나를 감시하고(출퇴근 카드, CCTV 등), 컴퓨터 스크린을 모니터한다. 이런 통제방식은 효율성과 생산성을 증진시킨다는 미명하에 용인된다. 공익요원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전자칩을 차게 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판옵티콘에 갇힌 죄수가 자신이 감시를 당하는지 아닌지를 모르듯이, 전자 판옵티콘의 정보망에 노출된 사람들 또한 자신의 행동이 국가나 직장의 상관에게 열람되지 않을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이나 작업에 주의를 기울인다.

시선의 국지성은 정보의 보편성으로 대체된다. 이제 감시는 탈-장소적인 속성을 띠면서 편재(遍在)한다.

규율시대는 가고, 통제시대가 도래하였다. 생산기계와 결합하여 상품을 생산하던 물질노동의 시대가 노동자의 육체를 직접 통제하던 ‘규율시대’였다면, 컴퓨터와 결합하여 정보를 생산하는 비물질노동의 시대는 정보를 통제하는 ‘통제시대’다.

전자/정보 판옵티콘이 벤담의 원형감옥과 또 다른 점은 감시의 중앙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 즉 탈중심화되었다는 점이다.

탈중심화된 감시는 주변으로 감시의 기능을 분산시킴으로서 감시가 더욱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일어나도록 만든다. 국민들이 대부분 사용하고 있는 포털 사이트의 데이터베이스를 생각해 보자.

사이트에 접속해서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원가입을 해야 하고, 회원가입 시에는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해야 한다. 로그인은 곧 자발적으로 CCTV 앞에 서는 것과 같다. 로그인을 하는 순간, 내가 포털 사이트에서 남기는 모든 기록들은 저장된다.

카페, 블로그, 메일 등. 그러나 우리는 포털 사이트에서 이러한 기록들을 어떤 식으로 관리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또한 전자/정보 판옵티콘에서 감시가 늘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업은 소비자에게 몇 가지 혜택을 주는 대신에 소비자의 정보를 얻어가는 것이다.

동의에 의한 감시. 마크포스터Mark Poster는 소비자 데이터베이스를 수퍼판옵티콘이라고 명명하고, 그 특징을 “감시당하는 사람이 감시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았다.

속박과 감시를 통한 통제가 아니라 협력에 기초한 느슨하고, 강제 없이 이루어지는 통제의 네트워크.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우리는 마치 스펙터클을 즐기기 위해서 감시의 대상이 되는 것을 신경 쓰지 않는 놀이동산의 관객들과 같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은 이제 ‘전자/정보/수퍼 판옵티콘’ 시대에 적합하게 각색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낮에도 밤에도 다 듣는다, 판옵티콘!’

● 심원 TOPIA논술아카데미 선임연구원 약력

- 1977년생 - 서울대 종교학과 졸(2004년) - 서울대 대학원 언론정보학과 졸업(2006년) - 현 TOPIA논술아카데미 강사 - TBS 교통방송 <윤은기의 굿모닝서울> 문화 평론 프로그램 ‘이반의 반격’ 진행 - EBS <손석춘의 월드FM> 문화 평론 프로그램 ‘이반의 천변풍경’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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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원 i2u4u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