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연인', '불새' 등 도식적 구도에도 인기, 답답한 현실 반영 분석어딘가 부족한 왕자 캐릭터에 남성들도 환호, 시청률 기여 이례적 현상

[‘왕자와 신데렐라’ 신드롬]
상투적 판타지, 시대를 위무한다

'파리의 연인', '불새' 등 도식적 구도에도 인기, 답답한 현실 반영 분석
어딘가 부족한 왕자 캐릭터에 남성들도 환호, 시청률 기여 이례적 현상


SBS 주말특별기획드라마 ‘파리의 연인’의 한 장면. 남자가 여자에게 사업상 중요한 파티에 함께 동행해줄 것을 부탁하자, 여자는 대뜸 현실적인 대가를 요구한다.

“그럼, 나 (가정부로) 복직시켜 주세요. 집세도 내줄래요?” 낭만적인 프랑스 파리에서 호화저택의 소유주인 백만장자 남자와 가정부인 여자가 밀고 당기는 사랑으로 돌입하게 되는 전환점이다. 재미있는 건 여자는 남자의 엄청난 자본력에 어이없어 하고 황당해 하면서도 ‘굴러들어온’ 복에 쾌재를 부르며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는 점이다. 영락없이 ‘오고가는 현금 속에 싹 트는’ 사랑이다.

관련기사
‘우리 가슴에도 왕자는 있다’
드라마 끝나면 꿈 깨세요!

가히 재벌 왕자들의 전성 시대다. 돈이란 막강 무기를 내세운 현대판 왕자들이 2004년 안방 극장을 화려하게 점령했다. ‘ 캔디’형 신데렐라를 두고 외삼촌과 조카 사이에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는 ‘ 파리의 연인’의 두 왕자 기주(박신양 분)과 수혁(이동건 분)의 눈부신 행렬. 더불어 MBC 수목 미니시리즈 ‘ 황태자의 첫사랑’의 거만한 사고뭉치 재벌 2세 건희(차태현 분), MBC 주말연속극 ‘ 애정의 조건’의 미국 유학파 엘리트 장수(송일국 분), 이혼녀를 죽도록 사랑하는 재벌 2세 총각 우경(이진우 분) 등 요즘 안방극장에는 온통 왕자들이 넘쳐 난다. 게다가 얼마 전 종영한 MBC 월화 미니시리즈 ‘ 불새’의 정민(에릭 분), SBS 미니시리즈 ‘ 발리에서 생긴 일’의 재민(조인성 분)을 통해 ‘ 왕자 이야기’는 이 시대가 소비하는 주요 판타지 가운데 하나임을 증명했다.

물론 드라마에서 백마 탄 왕자 이야기야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지난해 여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MBC ‘ 옥탑방 고양이’나 올해 초 KBS2 TV ‘ 꽃보다 아름다워’와 같이 우리네 소시민의 일상을 경쾌하고 실감나게 그려내 시청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생활밀착형’ 드라마들은 2004년 여름 안방 극장에서 죄다 발 붙일 곳을 잃었다. 바야흐로 드라마의 주류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로 확실하게 바뀌었다. 자, 그렇다면 왜 시청자들은 우리 생활을 성실하게 짚어 낸 ‘ 착한 드라마’에 등을 돌리고 돈을 앞세운 ‘ 왕자 판타지’에 아낌없는 환호를 보내는 것일까.


- 드라마의 주류 확 바뀌어

“ ‘ 왕자 이야기’는 각박한 현실을 잊게 하는 청량한 음료 같은 판타지입니다. 불황의 골이 깊어지고, 김선일 씨 피살 사건처럼 끔찍한 뉴스가 연이어 터지는 현실에서 시청자들은 곤궁한 환경에서 탈출시켜 주는 왕자의 구원을 통해 대리 만족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고려제일신경정신과 김진세 원장의 진단이다. 탈출구 없는 암울한 현실에서 대중은 왜 뜬금없는 ‘ 왕자 이야기’에 몰입하는 지에 대한 답이다. ‘ 파리의 연인’의 김은숙 작가가 밝힌 집필 의도는 감각적으로 육박해 온다. “ 현대판 신데렐라와 왕자 이야기는 상투적임에도 아직도 먹히는 소재인 것 같다. 드라마 보는 동안 카드값 걱정하지 않고, 남편이 어디 가서 술 먹고 있는지 고민 안 해도 되는 시간을 제공하면 좋겠다.”

그러나 뻔한 왕자 판타지가 각광 받는 것이 갑갑한 시대 상황 때문만은 아니다라는 데 이들 드라마의 ‘ 비밀’이 있다. 요즈음 방영되는 드라마에서의 왕자상은 예전의 왕자상과 질적으로 다른 남성 캐릭터로 시청자를 흡인한다. ‘ 사랑을 그대 품안에’에서 차인표가 보여줬던 잘 생기고, 돈 많고, 자상하기까지 한 왕자의 공식은 철저하게 깨졌다. ‘ 파리의 연인’의 박신양과 이동건, ‘ 황태자의 첫사랑’의 차태현은 모두 냉정하게 말해 조각 같은 절대 미남과는 거리가 있다. 개성적인 외모만큼이나 삶의 방식 또한 ‘제 멋대로’다. 마니시네마 전영민 대표는 “ 언제든 신데렐라에게 무너질 자세가 되어 있는, 어딘가 조금 부족한 느낌이 여성湧?모성애를 자극하고, 남성들에게 동질감을 주는 비결”이라고 분석한다.


- 여성 모성애 자극, 남성엔 동질감 부여

배국남 대중문화평론가 역시 ‘왕자 판타지’의 성공은 현대인의 감수성을 교묘하게 자극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동화 속 신데렐라는 백마 탄 왕자님이 유?링罐?가지고 나타난다는 것만으로 게임이 끝나지만, 요즘 왕자는 ‘ 재벌+ 로맨티스트’의 공식을 충실하게 따른다. 달라진 시대상에 맞춰 현대의 시청자들이 요구하는 보다 감성적인 남성상을 구현했다는 설명이다.

“ 카리스마를 내세운 최민수 같은 캐릭터는 이제 매력이 없습니다. 요즘은 ‘ 재벌’에 필수적으로 추가되는 기본 옵션이 ‘ 낭만’이죠. ‘ 천국의 계단’의 권상우처럼 대기업 최고경영자이면서도, 오직 한 여자를 위해서만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순수성이 중요한 가치로 떠올랐습니다.” 여성화하고 섬세해진 남성상을 요구하는 게 시대의 거시적 흐름이다 보니 시청자들이 TV에서 ‘ 낭만적’ 왕자를 찾아낸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남성의 여성화 경향은 로맨스 드라마를 소비하는 시청자층의 변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성화되거나, 적어도 비남성적인 감수성을 가진 남성들이 로맨스물의 새로운 소비층으로 속속 합류하기 시작했다. 제작진 스스로 ‘ 신데렐라 이야기의 결정판’이라고 말할 만큼 상투적인 이야기 구도를 가지고 있는 ‘ 파리의 연인’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인기 높은 로맨틱 드라마라는 점이다.

통상 드라마에서 남성 평균 시청률 10%의 벽을 뛰어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 파리의 연인’의 경우 유독 3~6회 평균 13.8%의 높은 시청률(6월 닐슨 미디어리서치 자료, 같은 기간 10대 이상 여성평균 시청률은 22%)을 기록하고 있다. 김나경 닐슨 미디어리서치 대리는 “ ‘ 파리의 연인’은 남녀 모두에게 인기가 높지만, 특히 이 시간대의 시청률 사각 지대에 있었던 30대 남성 시청자들의 지지가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이례적인 드라마”라고 말한다.

김동식 대중문화평론가는 “ ‘ 파리의 연인’처럼 전형적인 멜로 드라마에 남성 시청자들이 환호를 보내는 것은, 무조건 여성적인 것은 ‘ 남자답지 못하다’로 귀결되는 이분법적 사고가 완화된 증거”라고 지적했다. ‘ 메트로 섹슈얼’(metrosexual)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만큼, 자기 안의 여성성을 숨기지 않는 남성상이 각광 받는 현실을 반영한다는 해석이다.


- 또 다른 형태의 '욕망 아이콘'

우리 시대, 돈과 낭만을 양손에 쥔 왕자란 감성적 판타지를 선호하는 요즘 시청자들의 ‘ 욕망의 아이콘’인지 모른다. 거기에는 남녀의 구분이란 애초에 없다. 드라마의 주요 시청층인 40~50대가 낭만적 왕자를 통해 잃어 버린 러브판타지를 꿈꾼다면, 높은 실업률과 카드 빚에 허덕이는 젊은이들은 잠시나마 현실 탈출과 신분 상승의 대리만족을 맛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실이란 냉혹한 동화에 진저리 치는 서민들에게, 조금 상투적이어도 성공과 낭만을 맛볼 수 있는 드라마 속 왕자 판타지는 ‘ 지금 – 여기’를 잊게 하는 공간을 제공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왕자 판타지라는 꿈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동연 문화사회연구소장은 “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왕자 판타지에 지나치게 젖어 있다 보면, 이러한 꿈을 현실로 오인할 수 있다”녀 “ 실제로 다이아나비처럼 왕자를 만날 수 있는 확률은 0.001%도 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도 “ 누구나 갖고 있는 ‘ 왕자 판타지’에 관한 잠재된 욕망을 그리는 것은 탓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도 “ 성공이나 만남의 방식 등에서 좀 더 인간 본연의 탐구에 천착해 가는 창작 역량이 아쉽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이들 대중문화 연맛湄湧?동화적 상상에 바탕을 둔 왕자판타지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내다보는 데는 이견이 없다. 삭막한 현실에서 벗어 나보려는 적극적인 몸부림으로서, 갈수록 여성화해 가는 사회상이 낳은 부수적 트렌드로서.

■ 미니 인터뷰 - ‘파리의 연인’ 박신양
   
현실감 있는 재벌 2세 그리려 애써

“여자가 위기에 처하면 ‘뽕’ 하고 나타나고, 문제가 생기면 ‘척’하고 해결해주기 때문이 아닐까요. 돈도 많고 차도 여러 대 있고….”

요즘 대한민국 여자湧?마음을 달뜨게 만들고 있는 냉혈 왕자 박신양(37)이 내놓은 인기 분석이다.

‘파리의 연인’에서 자동차 재벌2세 한기주로 등장하는 그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폭발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솔직히 아직도 저는 로맨틱 남자 주인공에 동화되기보단 터프하고 영웅적인 남자에 끌리는 경향이 있거든요. 그러고 보면 세상이 변했나 봐요.”

최근 열기 이상의 반응을 얻고 있는 왕자 판타지에 대한 비판을 그는 의식하고 있었다. “사기꾼이 나온 드라마를 보고 사람들이 모두 사기꾼?되어야지 하고 생각하지 않듯, 왕자가 나온 드라마를 보고 전부 왕자를 꿈꾼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 대목, 고민도 적잖았다고.

“작가와 상의했습니다. 제발 사랑 놀음에 빠져 있는 재벌2세는 그리지 말자고요. 재벌2세가 사랑하는 데만 시간을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열심히 일도 하고, 자기를 쳐 내려은 사람을 견제도 하고….” 이렇게도 말했다. “상상 못할 정도로 무지무지하게 가난한 사람만큼이나, 현실에서 많지 않은 재벌2세를 현실 속에 있지 않을 것 같은 ‘사람’으로 그리는 작업에 애를 썼다.”

“극중 인물이 백마 탄 왕자냐 거지냐 하는 것은 적어도 제겐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단지 시청자들이 드라마를 보면서 조금 더 행복하고 재미있게 살아야지 하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걸로 좋은 거 아닐까요.” 거칠지만, 사람 냄새 나는 왕자의 묘한 매력으로 안방극장을 주름잡고 있다는 사실을 즐기고 있는 듯.

배현정 기자


입력시간 : 2004-07-07 14:28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