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물 먹은 애들은 환장해"
[日流열풍] 일본식 먹거리·소품 폭발적 인기 "일본물 먹은 애들은 환장해" 20~30대 마니아층 형성
140평 규모에 40여 개의 테이블을 갖추었지만, 빈 자리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손님이 들어서고 나갈 때마다 종업원들의 일본어 인사 소리가 실내에 가득 울려 퍼지고,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엔카와 J-POP이 취흥을 돋구고 있다. 안으로 들어서자, 종업원의 유니폼부터 눈길을 끈다. 일본 축제 ‘마쓰리’ 때 입는 주황색의 현란한 의상에, 이마에는 알록달록한 띠까지 묶었다. 실내 곳곳에 붙어있는 일본 전통 그림과 복(福)을 상징하는 고양이 ‘네코’. 거기에 붉은색 톤의 원목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젠(ZEN)’ 스타일 인테리어까지. 마치 일본에 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정통 일본식 선술집 ‘이자까야’를 그대로 본 뜨듯이 재현해 놓은 곳이다. “오픈(6월 23일) 한 지 단 3주 만에 종로 일대 주점의 매출 1위로 올라섰죠.” 이 주점 김양수 본부장의 자랑이다. “40대 이후 국수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다소 호응이 떨어져도, 워낙 20~30대 마니아층이 두터워 인기가 폭발적”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는 대학생 최모(24ㆍ여)씨는 일 주일에 한 번 꼴로 오는 덕에 이 집에서 벌써부터 단골로 불린다. 일본어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일본 문화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일본어 배운 지 석 달 됐는데, 종업원들이 일본어로 된 메뉴를 설명해주는 것이 재미있고 신기하다. 추천해주는 일본 술도 특이하고 분위기나 맛도 다 그러니까 좋다.” 이 주점은 2000년 8월 한남동에 1호점을 오픈한 이래 반응이 좋아 서울 압구정점, 청담점, 논현점과 인천 구월점 등 전국에 20여 개의 점포를 구축할 만큼 급성장세다.
비단 이 일식 선술집 뿐 아니다. 서울 신촌, 강남, 명동 등지에는 최근 일본어 간판이 부쩍 늘었다. 일본식 우동집, 호프집, 카페는 물론이고 심지어 길거리 좌판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일본문화 개방과 함께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일본 열풍이 한국의 음식문화를 바꾸고 있는 것이다. 한류 스타 배용준의 ‘욘사마’ 열풍이 일본 열도를 들끓게 하고 있다는 뉴스가 매일같이 전해져 오는 이즈음, 서울의 거리에는 일본식 휘장과 붉은 등이 큰 물결을 이루고 있다. 종로3가 파고다학원 앞. 30대 후반의 남자가 일본식 먹거리인 ‘타코야끼’(문어구이) 좌판 근처를 서성이고 있다. “지나면서 보기는 가끔 봤는데, 처음 용기를 내서 사보는 거예요.” 쑥스러운 듯, 5개 들이 1인분에 2,000원의 가격을 치르고 서둘러 자리를 뜬다. 40대 후반의 주인 이모씨는 “나이 먹은 사람은 일본 음식을 먹고 싶어도 주변 눈치를 보는 경향이 있어요. 타코야끼는 일본을 자주 드나들다가 7년 전에 처음 들여왔는데 그땐 인식이 안 돼서 얼마 못 가 장사를 접었지요. 작년부터 다시 장사를 시작했는데 올해는 30% 정도 매출이 올랐어요”라며 기분 좋게 설명을 한다. 옆에서 반죽을 돕던 이씨의 부인도 거든다. “흔한 떡볶이, 순대와는 다르잖아요. 외국어학원 앞에 있어서 그런지 일본에 왔다갔다 하는 이들이 자주 오지요. 젊은 사람들이 잘 먹어요. 아주 환장을 해.” 서울 신촌에서 타코야끼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이성환(43)씨도 요즘 하루 100팀 이상의 손님이 온다고 희색이다. 그는 “일본문화 개방과 함께 일본 만화나 게임 등이 많이 들楮으庸?일본 먹거리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며 “만화 ‘짱구’에서 타코야끼 먹는 것을 보고 엄마를 졸라서 오는 어린 아이들도 많다”고 말했다.
이처럼 10, 20대를 중심으로 일본 마니아가 늘어나다 보니 음반ㆍDVD 매장에서도 일류(日流)를 실감할 수 있다. 대형 매장인 서울 교보문고 핫트랙스는 지난 1월과 6월 각각 J-POP 코너와 일본 DVD 전문 코너를 마련했다. 매장 음반 담당 바이어 이보라씨는 “7월 6일 발매된 SMAP 음반은 나온 지 일주일 만에 100장이 넘게 팔렸을 정도”라며 “앨범 구매자들에게 홍보물을 주는 이벤트 응모 열기도 뜨겁다”고 말했다. 일류는 비단 1020 젊은 세대만의 지지를 받는 것은 아닌 듯 했다. DVD코너에서 한 중년 신사가 일본 애니메이션 작품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불교 미술가 석명룡씨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 6개를 한꺼번에 구입하고 싶은데 할인 혜택을 줄 수 있느냐”라고 점원에게 문의했다. “정서적으로 우리하고 맞닿아 있어 친근하잖아요. 그에 비하면 할리우드 작품은 볼 때는 재미있게 봐도 뒤돌아서면 버터 느낌이 나는 것 같은 차이가 있죠.” 석씨는 특히 “미야자키 하야오 같은 거장의 작품은 아이와 어른이 함께 봐도 좋은 흡인력이 있다”고 예찬론을 폈다. 생활 소품에서도 일류 열풍은 이어진다. 아기자기한 멋이 있고, 기발한 아이디어 상품이 많다는 게 일본 상품의 강점으로 꼽힌다. 서울 명동2가에 자리잡은 아바타쇼핑몰 1층에서 일본 잡화 브랜드인 ‘Akaishi’와 ‘Kai’제품을 판매하는 양미숙씨는 “예쁘고 실용적이니까 한 번 찾아온 손님들이 꾸준히 찾아온다. 등 마사지 기구와 뺨 올리기 같은 아이디어 제품은 물건이 들어오는 즉시 다 나간다”고 말했다. 이 건물 내 일본식 과자 전문점인 ‘aki-ko’의 20대 여점원도 “똥 모양 과자 같은 엽기상품이나 매콤한 향이 나는 쫄쫄이 쥐포 등이 인기상품”이라며 “모양이 귀엽고 특이하다고 사 가는 여자손님들이 많다”고 했다. 인근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앞에서 만난 신발 노점상 조모(28)씨의 좌판에는 ‘인기폭발 Japanese style 대나무 쪼리’라는 홍보 문구가 큼지막하게 붙어있다. 엄지와 검지 발가락 사이에 끈이 연결되어 있는 형태인, 발등이 시원하게 드러나는 일명 ‘쪼리’는 매해 여름마다 인기를 끄는 상품이지만, 올해처럼 어른부터 아이까지 폭 넓게 사랑을 받는 것은 신발 장사 5년 만에 처음이라고 그는 혀를 내둘렀다. “자, 보세요. 일본식 쪼리가 좌판의 95%를 차지하잖아요. 작년만 해도 다른 슬리퍼들에 밀려 한 귀퉁이에 놓고 팔던 것인데. 요즘은 하루 100개도 부족하다고 할 만큼 무서운 기세로 팔려 나가요.” 이처럼 우리생활 기저에서부터 밀려오는 일류의 홍수에는 올해 1월 1일 일본 대중문화의 전면 개방과 함께 장기불황으로 틈새시장 개척이 필요했던 상인들의 욕구가 절묘하게 결합했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인호 ‘창업e닷컴’ 대표는 “대중문화 개방이 일본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때맞춰 소자본으로 도전할 수 있는 일본 아이디어 箚ㆍ점포간옙湊팁?들어오면서 급성장하고 있다”고 일류의 원인을 분석했다. 서울 신촌에서 한ㆍ일 젊은이들이 교류하는 카페 ‘가케하시’를 운영하는 박용호 대표는 최근의 이 같은 일본문화의 영향력을 이렇게 평가했다. “한동안 미국 문화에 밀려 침체돼 보였던 일본 문화는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그 저력이 예상 외로 상당한 것 같다. 마니아층이 훨씬 단단하고 결속력이 강하다.” 박씨는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은 비슷하지만 우리와 상당히 이질적인 문화를 갖고 있는데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우리 본연의 미덕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입력시간 : 2004-07-21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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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