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닥·벤처 캐피탈 역할 강화 등으로 투자환경 조성 방침

[다시 벤처다] 벤처 활성화 대책에 팔 걷어붙인 정부
코스닥·벤처 캐피탈 역할 강화 등으로 투자환경 조성 방침

국내 벤처 기업가 1세대로서 ‘벤처의 대부’로 불렸던 정문술 전 미래산업 사장은 언론과 인터뷰를 할 때면 벤처에 대한 소신을 빠뜨리지 않고 말하는 편이다. 언론이라는 창을 통해 그가 세상에 외치는 주장은 대체로 ‘벤처에 국가 경제의 미래가 달렸다’는 것으로 모아진다.

다음은 그가 얼마 전 한 인터뷰에서 밝힌 자신의 벤처론이다. “지금 국내 벤처 산업이 꽉 막힌 상태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현실에서 벤처 말고는 달리 길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과거 국가에 많은 짐도 지웠지만, 그래도 벤처가 분명 미래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다. (…) 예전에는 선진국 제품을 국산화만 해도 팔렸지만 이젠 반드시 새로운 제품이어야 성공할 수 있다. 또한 새로운 것을 연구 개발해 세계 시장에 내놓으려면 현재의 구형 중소기업체로는 안 되고 벤처 기업이라야 한다.”

벤처 업계의 또 다른 명망가인 안철수 안철수연구소 대표가 벤처 산업을 바라보는 시각도 비슷한 듯하다. 2004년 11월 한 인터넷 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의 발언이다. “우리나라 경제 구조가 지금 이대로 가는 것이 희망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다. 경제가 대기업 위주로 흘러가고 벤처를 비롯한 중소기업들은 대기업의 하청 역할로 짜여진 구조에서는 우리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청년실업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지 솔직히 회의적이다.”

"벤처는 국가경쟁력의 활력소
그의 주장은 이어진다. “벤처는 이러한 산업 구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견실한 벤처가 많이 나와서 산업 구조에 역동성을 불어 넣어야 한다. 대기업 몇 개 쓰러진다고 해서 나라 경제가 거덜나는 구조로 가서는 안 된다. 국가 경제의 체질 개선을 위한 산업 포트폴리오 다양화 차원에서도 벤처의 활성화는 절박한 문제다.”

정문술 전 사장과 안철수 대표는 기술력으로 승부를 걸었을 뿐 아니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세간의 칭송을 받는 대표적인 벤처인들이다. 그들의 회사는 전형적인 벤처 기업으로 출발했지만 이제는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까지 올랐다. 때문에 벤처가 국가 경제의 활력소가 되고 미래를 연다는 그들의 주장은 설득력을 갖기에 충분하다.

사실, 한때는 그랬다. 불과 4~5년 전만 하더라도 벤처는 꿈과 희망, 그리고 대박의 대명사처럼 통했다. IMF 외환위기를 어깨에 걸머지고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벤처 산업을 빈사 상태에 빠진 국가 경제를 살리는 선봉장으로 삼았다. 당시 정부는 굴뚝 산업과 금융 산업의 대대적인 구조조정 이후 새로운 국부 창출의 전략으로 ‘인터넷 강국’ ‘IT(정보기술) 강국’을 내세웠는데, 벤처 산업이 이를 실행할 ‘보병 부대’로 떠올랐던 것이다.

정부 정책의 전폭적인 지원 사격과 IT 붐에 힘입어 벤처는 금세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화려하게 부상했다. 아이디어와 기술, 패기와 도전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너도나도 벤처 기업을 세웠고, 젊은 인재들은 벤처 기업의 문을 줄기차게 노크했다. 대기업들도 ‘벤처 엑소더스’ 행렬 때문에 골머리를 앓을 정도였다.

덩달아 중소ㆍ벤처 기업들의 자금 조달 창구인 코스닥 시장에도 한바탕 열풍이 몰아쳤다. 조금이라도 유명세가 있는 벤처 기업이 등록하면 개미들을 비롯한 투자자들의 돈 세례가 쏟아졌다. 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면서 코스닥 갑부, 벤처 갑부도 등장했다.

머니게임으로 변질, 거품붕괴로 이어져
문제는 바로 이 대목이었다. 벤처 업계에 ‘돈바람’이 불면서 특유의 모험심은 한탕주의로 변질돼 갔고, 기술력보다는 머니게임이 기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풍조가 횡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와중에 대주주의 주가 조작, 횡령 등 비리 사건이 수시로 터져 나왔고, 권력층과 결탁한 각종 게이??꼬리를 물면서 벤처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싸늘하게 식어갔다. 결국 1998년부터 불어 닥친 벤처 광풍은 거품 붕괴와 함께 불과 2년 만에 사그라질 수밖에 없었다.

2000년 상반기부터는 벤처 업계의 기나긴 겨울이 시작됐다. 무늬만 벤처, 껍데기만 벤처인 업체들은 줄줄이 문을 닫았고, 나름대로 기술력과 영업력을 갖춘 우량 벤처들도 투자자들이 외면한 탓에 돈줄이 마르면서 벅찬 겨울나기로 내몰렸다. 벤처 기업의 숫자는 2001년 1만1,392개로 정점을 찍은 뒤 해마다 줄어들어 2004년(11월 기준)에는 7,433개로 대폭 감소했다.

벤처 기업가들의 대박 꿈을 보장해주던 코스닥 시장도 갈수록 썰렁해져 갔다. 신규 등록기업의 숫자는 2000년 178개에 달했다가 2004년(11월까지)에는 고작 40개로 곤두박질했다. 코스닥 지수와 시가 총액을 보면 더욱 안쓰럽다. 1998년 말 1000선과 8조원 가량이던 코스닥 지수와 시가 총액은 1999년 말 2560선과 98조원 대까지 치솟았다가, 끝없이 빠지기 시작해 2004년 말에는 380선과 31조원 대로 내려앉았다. 같은 기간에 종목수가 350개 가량에서 900개 이상으로 늘어난 점을 감안하면 코스닥이 얼마나 침체 일로를 걸어 왔는지 쉽사리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4년여의 암흑기 혹은 조정기. 벤처 기업들은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져 갔다. 유력 증권사에서는 벤처 업종을 담당하는 애널리스트조차 따로 두지 않는 상황이 됐을 정도다.

하지만 벤처인들은 이제 기나긴 동면에서 깨어날 때가 됐다고 말한다. 그 동안 모진 시험을 거치며 옥석이 가려진 만큼, 시장의 정당한 평가도 받고 싶어 한다. 벤처의 봄날에 대한 기대인 것이다. 그런 희망은 최근 발표된 정부의 벤처 활성화 대책으로 어느 정도 힘을 받게 됐다. 정부가 지난 12월 24일 내놓은 벤처 활성화 대책은 과거 벤처 육성 정책에 대한 반성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또 구체적인 실천 방안들은 업계가 지속적으로 건의해 온 사항들을 대부분 수용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정부는 과거의 벤처 정책이 벤처 산업을 단기간에 급성장 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적지 않은 부작용도 낳았다고 판단한다. 정부가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시장 중심의 자율적인 성장이 오히려 저해됐다는 것이다. 벤처인증기업 제도는 대표적인 예다. 정부가 나서서 벤처 기업임을 확인하고 이들 기업에 대해서만 정책적 혜택을 집중한 것은 시장 원리를 왜곡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 인해 벤처 기업의 자유로운 진입과 퇴출은 저해됐고, 도덕적 해이가 업계 전체의 물을 흐려 놓았던 것이다.

제도적 뒷받침 통한 벤처 생태계 조성
그런 까닭에 정부가 이번에 내놓은 벤처 정책은 직접 개입보다는 제도적 뒷받침을 통한 벤처 생태계 조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한마디로 벤처 기업의 진입과 퇴출이 시장 원리에 따라 이뤄지는 사회적 인프라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또 벤처 기업들에게 ‘실탄’이 원활하게 공급될 수 있도록 벤처 캐피탈과 코스닥 등의 역할을 강화해 투자 환경을 만들어준다는 방침도 마련됐다.

패자부활 프로그램도 눈에 띄는 정책이다. 벤처 기업 100개 중 95개는 실패한다는 업계의 속설처럼 그 동안 수많은 벤처 기업들이 쓰러진 게 사실이다. 이 때문에 실패한 벤처 기업들의 훌륭한 원천 기술이 사장되는가 하면 이들 기업의 대주주나 경영자는 신용 불량으로 인해 재기를 못하게 되는 등 사회적인 손실이 만만치 않았다. 패자부활 제도는 이처럼 실패한 벤처 중에서 도덕적 해이가 없었던 기업을 선별해 국가 경제 기여의 기회를 다시 주자는 취지로 마련된 것이다.

정부가 전해 준 ‘크리스마스 선물’에 대해 벤처 업계는 대체로 환영하는 기색이다. 침체에 빠진 벤처 산업을 되살리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확인됐다는 것이다. 한 벤처 기업 관계자는 “지난 4년 동안 벤처 업계에 대한 관심이 크게 줄어들면서 기술력과 도덕성을 갖춘 벤처 기업들도 어렵게 버텨온 게 사실”이라며 “이번 정부의 대책이 벤처 업계에 큰 활력소가 됐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라고 말했다.

대형 창투사의 한 기업 심사역도 “2004년 코스닥에 등록한 기업들만 보더라도 내실이 튼튼한 우량 기업들이 많았지만, 시장이 냉랭해 제대로 된 평가를 못 받았을 뿐더러 투자 유치도 힘들었다”며 “이런 상황에 벤처 기업들에 대한 투자 분위기를 정부가 적극 조성하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라고 밝혔다.

현재 벤처 기업들은 평균 44.1명의 직원을 고용, 평균 9.2명의 일?중소기업보다 월등한 고용 창출 능력을 갖고 있다. 해외 수출 기업의 비중도 58.5%에 이른다. 벤처 기업들이 이미 우리 경제에서 빠뜨릴 수 없는 주요 축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사실이다. 2005년 경제 성장률 5%를 목표로 하는 정부가 벤처 산업을 부흥시키려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시장원리에 맞는 정책 펼쳐야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런 우려도 내놓는다. 벤처를 경기 변동 수단으로 활용하다가는 지난 DJ 정부의 시행착오를 되풀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그저 벤처가 스스로 일어나고 성장할 수 있는 적절한 토양과 합리적인 룰만 만들어주고 나머지는 시장에 맡기라는 지적이다.

2005년, 벤처는 진정한 봄날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뿐 아니라 정부와 시장의 희망도 커져 가고 있다.

업계 얘기를 들어보니…
"재정지원확대 가장 시급"

정부의 벤처 활성화 대책에는 벤처 업계의 의견이 상당 부분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동안 벤처기업협회(장흥순 회장) 등을 중심으로 업계가 지속적으로 호소해 온 애로 사항들이 개선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이와 관련, 여론 조사 기관 한국갤럽이 지난해 1,000개 벤처 기업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는 현재 벤처업계의 실태가 잘 드러나 있다. 응답 기업들 상당수는 벤처 지원 제도가 개선돼야 한다고 지적했는데, 정책 자금 확대(42.7%), 신용 보증 확대(24.0%), 조세 지원 제도 개선(12.4%) 등 ‘돈’과 관련한 민원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경영 활동상의 어려움을 묻는 질문에는 기술 인력 확보(34.7%), 원자재 가격 급등(16.3%), 개발 자금 조달(15.9%), 금융 기관 차입(10.8%) 등의 순으로 답변했다. 기술 인력 확보가 첫 번째로 꼽힌 것은 벤처 거품 붕괴 이후 인재들이 벤처 기업을 꺼리는 경향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잘 나가는 첨단 기술업체의 경우에도 유명 대학 출신 인력을 뽑기가 쉽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현재 경영 상태에 대해서는 10개 중 3개 기업이 나쁘다고 답한 반면, 7개 기업은 내년(2005년)에 좋아질 것이라고 전망해 눈길을 끌었다.

코스닥 시장 제도에 대해서도 벤처 기업들은 할 말이 많았다. 먼저 코스닥 등록 요건을 완화해 줄 것을 바라는 목소리가 40%에 달했고, 연기금 등 ‘큰손’들의 투자가 확대돼야 한다는 지적(25.4%)과 불공정거래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요구(16.5%)도 많았다. 코스닥 시장의 하루 가격 제한폭에 대해서도 증권거래소와 같은 수준으로 변경해 줄 것을 희망하는 기업들이 46.8%에 달했는데, 정부의 이번 활성화 대책에 이 요구는 반영됐다.

또 벤처 기업들은 신용 보증 기관을 이용할 때도 적지 않은 불편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선 매출액 위주의 보증 금액 산정이 가장 큰 애로점(46.1%)이었고, 보증 한도가 낮다(13.9%)거나 연대 보증을 과도하게 요구(9.6%)하는 것도 불만 사항이었다.

한편 패자 부활 시스템에 대해서는 80.4%의 응답 기업들이 필요하다고 답변한 반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를 나타낸 기업은 16.7%에 불과했다. 패자부활을 위한 실질적인 지원책으로는 재기 자금 등의 직접 지원(49.0%), 컨설팅 등의 간접 지원(21.5%), 신용 불량 해제(26.7%) 등이 많이 거론됐다. 또 패자 부활의 부작용을 막기 위한 보완 장치로는 보증 및 대출 기관의 정기적인 사후 관리(35.4%), 외부 회계 감사(27.1%), 경영 정보 공시(23.5%) 등이 필요한 것으로 지적됐다.


입력시간 : 2005-01-05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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