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상지·실재 놓고 학계 논란… 신화에 머물러 있는 단군조선, 역사로 끌어올려야

한국사가 위기다. 일제 강점기 식민사관의 잔영이 여전한데,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이 매섭다. 일본, 중국의 주 공격 대상은 한국 고대사, 그중에서도 고조선 역사이다.

공격의 핵심은 고조선 역사에 대한 시간과 공간의 축소다. 한국사의 출발인 단군조선의 실재를 부인하고 고조선의 광대한 영역을 삭제하겠다는 것이다. 고조선을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 내 북부지역에 묶어 놓고 옛 요동과 만주지역을 자신들의 역사 영역으로 만들겠다는 속셈이다.

자칫 대책 없이 밀릴 경우 고조선은 실체가 없는 신화로 남거나 중국 역사의 일부로 편입될 판이다. 고조선을 되살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사학자인 단재 신채호는 “역사만이 희망이다”이라며 “고조선 역사가 없으면 한국사도 없다(若無古朝鮮史, 是無韓國史)”고 설파했다.

고조선을 둘러싼 주요 논란을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의 ‘희망’을 살펴봤다.

단군, 신화인가 역사인가

단군조선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은 한국사 전체의 틀을 결정하는 요체다. 단군조선을 ‘역사’로 보면 한국사를 2000년 이상 끌어올릴 수 있지만, ‘신화’로 해석하면 기자조선(기원전 1100년), 또는 위만조선(기원전 206년) 이후가 한국사의 출발점이 된다.

국내에서 단군조선은 아직 신화에 머물러 있다. 일제하 이마니시류(今西龍)와 그의 제자인 이병도 박사 등에 의해 단군조선이 날조된 신화로 규정된 이래 사학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단군신화를 ‘실재’의 역사로 봐야 한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단군신화는 구석기ㆍ신석기ㆍ청동기 시대를 거치면서 고조선이 건국되기까지 우리 민족이 성장하면서 체험했던 역사적 사실을 압축적으로 전하는 우리의 상고사(上古史)라는 것이다.

중국 산둥성 가상현에 전한(前漢, 기원전 202~서기22) 때 만들어진 무씨사당의 석실 그림 내용이 단군신화와 흡사한 것이나 고구려 각저총(角抵塚) 고분의 씨름하는 벽화에 곰과 범이 짝을 이뤄 등장하는 것은 고구려인들이 단군신화의 내용을 알고있었음을 뜻한다.

<사기(史記)> <한서(漢書)> 뿐 아니라 기원전 7세기 경의 <관자(管子)>, 기원전 6~1세기를 포괄하는 <산해경(山海經)> 등의 문헌에도 고조선이 등장한다. <구당서(舊唐書)>‘고구려조’에는 가한신(可汗神) 즉, 단군을 섬긴다는 기록이 있다. 그만큼 단군조선이 동시대의 주변국에 널리 인식되고 있었음을 방증한다.

중국의 위략(魏略, 280~289년에 편찬)에 고조선의 첫 도읍지인 아사달(阿斯達)이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환웅족이나 한족(韓族)과 관련 있고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과 <삼국지(三國志)>‘동이전’에 예족(濊族)은 호랑이를 섬기고 고구려족은 큰 굴을 섬긴다고 한 기록은 단군신화의 줄거리와 매우 비슷해 한족, 고구려족, 예족이 우리 민족을 형성한 중심세력이었음을 시사한다.

국내 학계에서는 최근 중국 만주지역(동북3성)인 요녕성의 홍산(紅山)문화에서 가까운 ‘하가점(夏家店)’의 청동기 유물을 주목한다. 그곳에선 기원전 2400여 년의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가 대량 출토됐다.

지난 2001년 진주 남강댐 수몰지구와 강원도, 전남 등지의 청동기 유물을 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 1500년 안팎으로 나타났다. 강릉 교동 주거지 1호의 경우 연대가 기원전 1878~1521년 사이인 것으로 나왔다

고조선의 발상지가 한반도보다 앞선 요동ㆍ요서 지역이라는 학설에 의하면 하가점 청동기 유물과 비교해 기원전 2333년에 건국한 고조선은 신화가 아닌 역사가 될 수 있다. 더욱이 고조선의 유물인 청동검, 고인돌, 미송리형 토기 등의 연대가 기원전 2000년을 넘나드는 것도 단군조선의 실재 가능성을 높여 주고 있다.

고조선의 강역은 어디까지인가

고조선의 영토는 동북공정의 직접적인 타깃이다. 최근 중국이 고조선ㆍ고구려ㆍ발해의 무대였던 만주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를 편입시키려는 ‘요하문명론’(僚河文明論)은 대표적인 작업이다.

고조선의 강역과 관련해서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 고조선의 실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관건이다

고조선의 중심지에 대해서는 크게 대동강 중심설, 만주 요령성 중심설, 초기에는 요동에 있다가 대동강 유역으로 이동했다는 중심지 이동설 등으로 나뉜다.

‘대동강 중심설’은 <삼국유사>에서 ‘단군왕검이 평양성에 도읍해 비로서 조선이라고 불렀다’는 기록과 중국 <한서> ‘조선전’에서 한나라 초기 서쪽 경계를 ‘패수’라고 한 기록 등이 근간을 이루며 일제 강점기에 더욱 심화됐다. 1930년대 평양 일대에서 중국계 유물이 대량 발견되면서 통설로 굳어갔으며 초기 국사학자인 이병도ㆍ이기백 교수를 비롯해 최근의 이종욱ㆍ송호정 교수 등이 동조하고 있다.

대동강 중심설에 따르면 고조선의 영토는 한반도 북부에 그친다. 하지만 다른 문헌사료와 고고학 사료와 엇갈린다.

<삼국지> ‘위서동이전’이 인용한 <위략>에는 ‘연나라 장군 진개를 파견해 조선의 서쪽 지역을 침공해 2,000리의 땅을 빼앗아 만반한을 경계로 삼았다’는 구절이 있는데 평안남도 전체를 합쳐도 2,000리가 안 되기 때문에 서쪽 2,000리를 상실하고도 요동현의 속현을 국경으로 삼았다면 고조선의 영역은 대동강 유역에 국한될 수 없다. .

또한 <사기> ‘진시황본기’26년조에는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의 영토가 ‘동쪽은 바다에 이르고 조선에 미쳤다’고 하였고 진나라와 조선이 국경을 접한 지역을 요동이라고 말하고 있다.

당시 요동은 현재의 요동과 다르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삼국지> ‘고구려’전에 “고구려는 요동으로부터 동쪽으로 1,000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즉 고조선과 진나라의 국경은 지금의 요동으로부터 서쪽으로 1,00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대동강 중심설로는 해석할 수 없는 기록이다.

그래서 만주의 요동이 고조선의 중심지라는 ‘요동 중심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신채호ㆍ정인보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이후 윤내현ㆍ이덕일 학자 등이 취하는 학설이다.

요동 중심설은 고조선의 서쪽 국경선인 패수를 현재의 대릉하로 보는 시각(다수설)과 그보다 훨씬 서쪽인 난하로 보는 견해로 나뉘며 고조선의 남쪽 경계에 대해서도 청천강으로 보는 견해와 예성강으로 보는 견해, 남한의 끝까지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중심지 이동설’은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는 요령지역이었으나 후기에는 중국 세력의 확장에 따라 한반도 서북부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논리다.

중심지 이동설의 가장 큰 쟁점은 고조선 멸망 당시의 도읍이 현재의 평양인가 하는 것과 관련 대동강으로 이동했다는 견해와 만주의 평양 지역이라는 견해로 나뉜다.

요동 중심설과 중심지 이동설은 고조선의 강역을 한반도와 중국 진나라의 만리장성이 끝나는 옛 요동 갈석산을 경계로 한 만주 전역의 광범위한 영토로 해석한다.

한사군은 어디에 위치했나

한(漢) 무제는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을 물리친 후 그곳에 4개 군(郡)을 설치하였다. 이른바 ‘한사군’이다. 한사군의 설치 여부와 위치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 영토에 대한 야욕을 지닌 중국의 동북공정의 주요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어 정확한 고증이 요구된다.

한사군의 위치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와 맞물려 있는데 앞서 이병도ㆍ이기백으로 이어지는 주류 사학계의 ‘대동강 중심설’에 따르면 한사군은 ‘낙랑=대동강 유역, 진번=자비령 이남~한강 이북, 임둔=함남, 현도=압록강 유역 동가강’으로 비정된다.

그러나 한사군을 한반도에 위치할 경우 사료와 모순된다. <사기>에 한나라가 조선을 공격하는 과정에 ‘그해 가을에 누선장군 양복을 파견하여 제(齊) 지역에서 발해로 배를 띄워 바다를 건너게 하였으며’라는 구절이 있다. 제 지역은 오늘날 산동반도이며 발해는 산동반도 왼쪽에 있는 바다로 한의 수군이 대동강이나 청천강 쪽으로 항해를 했다면 ‘발해로 배를 띄워 바다를 건너게’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중국의 <수경주(水經注)>는 ‘패수’에 대해 ‘패수는 낙랑 누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고 설명한다. 낙랑군이 평양 지역에 있었다면 패수가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가’는 경우는 없다.

대동강 중심설이 근거로 삼는 대동강 일대에서 발견된 낙랑 유물과 대해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대동강의 낙랑 유물은 고조선을 멸망시킨 전한(前漢, 기원전 206~서기 24) 때의 것이 아닌 후한(後漢, 서기 25~219) 때의 것으로 한사군의 낙랑은 만주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문제의 낙랑 유물은 후한이 멸망시킨 낙랑국의 것”이라고 말했다. 즉 한사군인 낙랑과 후한시대 대동강 유역의 낙랑국은 전혀 다른 세력이라는 설명이다.

기자조선은 실재했나

기자조선은 한국 고대사의 미스터리다. 기자조선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고조선사를 포함한 한국사의 체계가 달라진다.

기자(箕子)는 중국에서 은(殷, 또는 商)나라와 주(周)나라 교체기에 고조선으로 망명한 인물로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였지만, 광복 이후의 사학계는 이를 부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국사 교과서도 기자조선이 빠진채 고조선(단군조선)과 위만조선만 언급돼 있다.

‘기자부정론’은 한반도에 기자와 관련된 은나라 유물(갑골문 등)이 발견되지 않았고 기자가 기원전 1100년 전후의 인물로 한반도의 청동기 시기(기원전 800~1000년)와도 모순된다고 한다..

반면 윤내현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소장은 사료에 대한 고증 부족을 지적하면서 “고조선의 강역을 한반도 북부 대동강 유역으로 한정하고 기자조선이 고조선을 대체한 국가로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윤 소장에 따르면 기자가 망명한 곳은 고조선의 서부 변경인 지금의 난하 유역으로 산동반도의 갈석산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고 한다. 기자는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고조선의 거수국(渠帥國, 중국식으로는 제후국)이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에서 황하유역 유물이나 갑골문자 등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는 설명이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기자가 고조선으로 망명해 온 후 고조선은 도읍을 장당경(藏唐京)과 아사달로 두 번 옮겼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기자국이 고조선의 서부에 자리했고 그 동쪽에 고조선이 존재하면서 도읍을 옮긴 것이라는 분석이다. 윤 소장은 기자조선은 고조선의 한 부분으로 한국사의 일부라는 것이다. .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기자가 무왕에게 조선의 제후로 봉합을 받았다 할지라도 무왕의 신하가 아니었다는 <사기>의 기록은 조선은 무왕의 지배 아래 있는 나라가 아니었고 기자 역시 광대한 조선의 일부 지역의 제후에 불과했다”면서 “기자조선을 역사의 실재로 인정하지 않으면 단군조선도 부정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기자에 관한 기록과 초상
사진 A - 낙랑군의 위치와 만리장성 / 사진 B - 한사군의 위치에 관한 이병도의 설

박종진 차장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