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대담의 장소로 얼른 제의했던 곳은 자기 집 인근 지하철역 커피숍이었다. 사람들의 번다한 출입이 끊이지 않는 지하철역 다방은 사실 그런 논의의 자리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라는 사실은 나가서야 알게 됐다. 내 의도는 배반당했던 것일까?

진지한 대담이 오가기에는 황당하리만치 넓은 곳이었다. 게다가 거의 만원. 악을 쓰듯 사람들은 대화하고 있었고, 그 같은 현장 상황에 다소간 긴장한 나는 그의 말을 수첩에 빼곡히 옮겨 갔다. 데모 현장이 아니고서야 생각하기 힘든 취재 여건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는 대담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을 만큼 내 인식망을 비껴갔다. 장터의 소음 뺨치는 곳에서 고도의 음악적 담론이 천연덕스레 펼쳐진 것이다. 우리는 도(道)라도 수수(授受)하고 있었던 것일까? 핸드폰도 없고 이메일도 안 한다는 이 '자발적 문명 지체인'의 프리 재즈, 아니 프리 뮤직 이야기 속으로 나는 그렇게 끌려 들어갔다.

글은 철저히 1인칭 시점을 따랐다. 짧지 않은 기자로서의 시간이 준 경험에 의하면 글은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보다는 그 편이 가장 진솔해 질 수 있다는 생각이다. 정밀한 취재를 전제로 한 상태에서. 한 가지 더. 대학 시절, 수업 텍스트로 읽은 포크너의 소설 '분노와 음향'에서 구사된 1인칭 시점 서술이 보여준 강렬함의 기억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길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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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 데 처박혀 새로운 음악을 찾아 두문불출한다는 말까지는 않겠지만

나는 3년째 웬만한 연락을 끊고 산다. 어쩌다 사람들을 보면 연락하지 말라고 말하고 다닌다. (나는 이 대목에서 재즈에서 관용화된 말인 '우드셰딩(wood shedding)'을 얼핏 떠올렸다. 1996년에 냈던 책 '재즈 재즈'의 후기에서는 그 말 뜻을 이렇게 옮겼다. '재즈 뮤지션이 새로운 음악을 탐구하기 위해 깊은 숲 속 통나무집처럼 세상과 격리된 데 처박혀 연구에만 몰두하는, 재즈 특유의 관습을 가리키는 말'그리고는 거기에 맞는 역어로 '용맹 정진'이라는 불교 용어를 번역어로 갖다 붙였으니, 좀 견강부회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내 세계를 정리할 때가 됐다는, 내면이 내는 소리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깥 일보다 즉흥 작업이 그보다 절실하다는 생각이다. 여태껏의 음악적 표현을 정리하고 가다듬을 때가 된 것이다.

요즘 음악적으로 몰두하는 작업도 내 표현 중 얕은 부분, 바람직하지 않은 부분을 잘라내는 것이다.(이에 관한 그의 의지는 예상외로 강했다) 듣기 편하게, 대중을 의식하며 하기 싫어하면서도 한 부분, 즉 멜로디 같은 것들은 다 잘라내겠다. 필요 이상의 감상을 요구하는 도시적 감성은, 들어달라 강요하는 것은 다 잘라내겠다.(평소의 어투와 대비시킨다면 그것은 거의 '척결'의 수준이었다. 이어진 그의 말은 이렇다.) 내 음악이 어렵다, 모호하다고 하는 것은 선입견 때문이다.

나는 포퓰러 뮤지션이다. 역사적으로 크게 보아 전위적 표현은 이후 세대에 들어서는 포퓰러해 진다.(그는 '동시대성'에 대해 특별한 정의를 요구한 셈이다) 나의 음악은 당시의 느낌, 구체적으로는 내 행복감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연예인이 아니고 음악가다. 내가 연주하는 곡은 관객이 아니라 내가 좋아 쓰는 곡이다. 관객이 좋아하면 다행이다. 인기인이 안 되더라도 나름의 음악 세계를 만들어 나를 행복하게 해야 한다.

사실 인기인에 대한 샘은 여전하다('샘'이라고, 그는 즉물적 표현을 마다 않았다). 그 유혹을 뿌리치고 자제할 뿐이다. 다시 말해 내가 가야 할 중요한 길을 느끼며 부단히 인내하는 과정이다. 내 나이가 되면 사람은 근본을 생각한다. 음악도, 인생도. 현실보다는 이상을 우위에 두는 시기다.

(그는 한참 동안 과거를 불러 모았다. 그에 의해 부려진 과거의 정보는 물론 선후 관계를 명확히 해보려는 나에 의해 수시로 간섭 받았다. 그를 가리켜 기자적 본능이라 해도 그리 어긋난 말은 아닐 것이다. 절대 추상으로 오기까지의 경로가, 얼추 얼개를 드러낸 데 그 같은 개입은 분명 일조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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