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준 국무총리 지명자는서울대 3학년때 사시 수석박정희 정권 시절 소신판결

김용준 국무총리 지명자는 소아마비를 딛고 헌법재판소장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장애인들에게는 '살아있는 신화'로 통할 정도다.

그는 한화그룹의 전신인 조선총포화약주식회사 대표를 지낸 김봉수씨의 5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6ㆍ25 전쟁 때 납북돼 편모 슬하에서 성장했지만 친가와 외가가 모두 부유한 편이어서 경제적 어려움은 없었다.

김 지명자는 3살 때 소아마미를 앓아 지체장애 2급 판정을 받았고, 이 때문에 어머니 등에 업혀 등교할 정도로 힘든 학창시절을 보냈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희망하던 경기고 진학이 좌절되는 설움도 겪었다.

그는 서울고 2학년 재학 중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고, 대학 3학년 때인 만 19세에 고등고시(현 사법고시)에 수석 합격, 1960년 최연소 판사로 법조계에 발을 내디뎠다.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법관이 된다면 독점 기업 등 강자의 횡포로부터 보다 많은 약자를 돕는데 애쓰겠다"는 포부를 밝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후 그는 서울가정법원, 광주고법, 서울고법 등에서의 부장판사 생활과 서울가정법원장을 거쳐 1988년 대법관, 1994년 제2대 헌법재판소 소장에 올랐다.

판사 시절 박정희 정권의 지향점과 상반되는 판결을 다수 내리는 등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좋은 인연이 아니었다. 1963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 권한대행의 대선 출마를 반대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구속된 송요찬 전 육참총장을 구속적부심에서 석방한 것이 대표적이다.

김 지명자는 헌법재판소장에서 물러난 후에도 법무법인 율촌 상임고문, 헌법재판소 자문위원장, 대검찰청 공안자문위원장을 지내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해왔다.

변호사 시절에는 장애 학생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하고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을 지낸 공로 등을 인정받아 2011년 한국법률문화상을 받기도 했다.

김 지명자는 그 동안 정치권과 거리를 둬왔으나 대선 과정에서 박근혜 대선 후보 중앙선대위의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고, 대선 후에는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을 수행해 왔다.

그의 취미는 수영이다. 신체 장애에도 불구하고 한강을 헤엄쳐 건너 다닐 정도로 건강을 유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가족은 이화여대 재학 중 메이퀸 선발대회 학과 대표로 뽑히기도 했다는 부인 서채원씨와 2남2녀가 있다.

장남 김현중씨와 두 사위 최영익 김범수씨가 모두 변호사이다. 김 지명자는 최영익 변호사가 대표변호사로 있는 법무법인 넥서스 고문을 맡고 있고, 외국변호사인 김현중씨도 넥서스에서 일하고 있다.

김 지명자는 지체장애로 군 면제를 받았다. 장남과 차남도 각각 신장ㆍ체중, 질병(통풍)으로 면제받아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다.

김 지명자는 대법관 시절이던 1993년 재산공개 때 자신과 부인, 두 아들을 포함해 29억8,000만원의 재산을 신고했다. 그는 장남과 차남 명의로 19억8,000만원의 재산을 신고했다. 또 모친도 상당한 땅을 소유한 재력가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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