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원을 그린 화가 고갱 그 이후' 展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 이번 전시의 최대 걸작인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는 고갱의 폴리네시아 시기를 상징하는 대표작으로 고갱 예술의 유언적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은 고갱 예술을 철학적으로 함축하고 있으며, 그의 인생관, 세계관, 우주관을 엿볼 수 있는데 탄생에서부터 삶과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운명을 맨 오른쪽에 있는 아기, 중앙의 과일 따는 인물, 맨 왼쪽 죽음을 앞둔 노인으로 각각 상징하고 있다. 1897~1898. 보스턴미술관 소장.
상징·종합주의 회화기법 통해 새 미술사조 연 최후의 인상파
1874년부터 1903년 작품 예술적 특징 양분 집중 소개
브르타뉴 시기 상징주의 작품…'설교 후의 환상' 등 대표작 전시
폴리네시아 시기 원시 힘 탐구… 타히티섬의 원주민 삶 담아내

최후의 인상주의 화가 폴 고갱(1848~1903)의 국내 최초 회고전이 열린다. 한국일보 주최로 14일 서울시립미술관 본관에서 막을 연 '낙원을 그린 화가 고갱 그 이후' 전에는 전 세계 30여 공공미술관에서 대여한 대표작 60여 점이 선보인다.

특히 고갱의 3대 걸작으로 꼽히는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1897~1989), '설교 후의 환상'(1888), '황색 그리스도'(1889)를 처음으로 한자리에모은 데 각별한 의미가 있다.

고갱은 인상주의를 통해 화가로 입문했지만 상징주의, 종합주의라는 새로운 회화기법을 통해 새로운 미술사조를 열면서 인상주의 시대에 종말을 고한 최후의 인상파 화가다.

세기말(19세기) 산업문명을 뒤로하고 남태평양 타히티섬에서 원주민들의 원시적 삶을 통해 삶과 존재의 근원을 화폭에 담아낸 그의 회화는 야수주의, 표현주의, 입체주의 나아가 추상미술에 이르는 20세기 미술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설교 후의 환상' - '설교 후의 환상'은 고갱의 브르타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인상주의와의 결별을 알리며 상징주의, 종합주의의 탄생을 알린 걸작이다. 브르타뉴 지역 여인들과 성직자에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판화를 변형한 씨름꾼과 나무, 소를 결합했는데 이 요소들을 하나로 이끄는 주홍색 바탕과 단순한 형체는 고갱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인상주의 그림 습관에서 철저하게 벗어났음을 보여준다.1888년작. 캔버스에 유화.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에든버러.
이렇듯 고갱의 작품은 미술사적 의미를 지녔지만 오랜 방랑과 타국에서의 힘들었던 삶 때문에 남은 게 많지 않고 세계 도처의 소장자들에 흩어져 있어 전시회가 쉽지 않은 작가다.

이번 전시는 프랑스 오르세미술관을 비롯해 미국 보스턴미술관, 러시아 푸시킨 국립미술관 등 전 세계 30여 미술관에서 대여한 대표작들을 모았다. 전시는 고갱의 예술의 특징을 양분하는 브르타뉴 시기(1874~1890)와 폴리네시아 시기(1891~1903) 작품을 집중적으로 소개한다.

인상주의 탈피 새 조류 열어

고갱은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주식 중개인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취미로 그림을 그리다가 1876년 처음으로 살롱에 출품한 이후 1883년 35세에 증권거래점을 그만두고 전업 화가로 나섰다. 이후 마네ㆍ들라크루아ㆍ세잔 등의 작품을 연구하며 화법을 터득했고 상징주의 시인 말라르메를 비롯해 발레리, 프루스트, 드뷔시(인상주의 음악가) 등 당대의 지성인들과 교류하며 예술적 안목을 넓혔다.

고갱은 당대를 풍미하던 인상주의에 의문을 제기하고 1886년 도시생활에서 벗어나 시골인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옮겨 작업을 했다. 이듬해 남대서양을 돌아 다시 프랑스로 온 고갱은 남프랑스 아를의 '노란집'이라는 화실에서 고흐와 함께 지내다 고흐가 귀를 자르는 사건을 계기로 다시 브르타뉴 퐁타방으로 가서 인상주의를 탈피하는 작품을 제작했다.

타히티의 여인들. 1891년작. 캔버스에 유화. 오르세미술관 소장.
그후 문명세계에 혐오감을 갖던 고갱은 1891년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떠나 그만의 화풍을 창조해갔고, 이후에도 파리와 타히티섬을 오가며 숱한 명작을 남겼다.

문명 떠나 근원을 예술에 담다

이번 전시는 고갱의 예술적 특징을 양분하는 브르타뉴 시기(1874~1890)와 폴리네시아 시기(1891~1903) 작품을 집중적으로 소개한다.

도시생활에 지쳐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간 고갱은 원근법을 없애고 형체와 윤곽을 단순화하는 형식의 변화와 함께 현실과 상상을 결합시킨 상징주의, 종합주의 기법을 선보이며 기존 서양 회화의 전통과 단절했다.

이 시기에 그린 '설교 후의 환상(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은 그 대표작으로 브르타뉴 주민들이 야곱과 천사의 씨름에 관한 <성경> 구절에 대해 강론하는 사제의 설교를 들은 후 마음속의 이미지를 응시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황색 그리스도' 1889, 캔버스에 유화. 올브라이트녹스 아트 갤러리 소장
이러한 상징주의는 브르타뉴 전통 의상을 입은 여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황색 그리스도' 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밖에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1890~1891), '암소가 있는 해변'(1888) 등도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다.

고갱의 폴리네시아 시기는 화풍이 완성된 때로 그는 1891년부터 1893년까지, 1895년부터 1901년까지 타히티섬에 머물며 강렬한 색채로 그곳의 원시적 삶을 화폭에 담았다.

"나는 문명의 손길로부터 나 자신을 자유롭게 지키기 위해 원시로 떠난다."

고갱은 문명으로부터 벗어나 원시의 힘을 수혈받기 원했고, 그 근원을 찾아내려고 자신의 예술혼을 불살랐다. 그리고 원시의 생명력이 충만한 타히티섬에서 예술적 재세례를 받았다.

당시 고갱의 그림 앞에 선 시인 말라르메는 "어찌 이토록 깊은 신비를 어찌 이토록 찬란한 색채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하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 '타히티의 여인들' '파아 이헤이헤'(1898) '세 명의 타히티인'(1899) 등 이 시기의 대표작들이 전시에 선보인다. 특히 마지막 유언으로 여기며 제작한 걸작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는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로 스스로 "모든 정력을 쏟아부었다. 이보다 더 뛰어나거나 비슷한 작품은 결코 그릴 수 없다"고 했다. 9월29일까지 전시.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1890-1891년 작. 캔버스에 유화. 오르세미술관 소장.

현대 작가 5인, 고갱을 변주하다



이번 전시에는 5명의 현대 작가들이 고갱의 작품을 재해석한 작품도 함께 전시한다. 고갱의 독특한 미술사적 양식을 재조명하고 고갱 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노재윤의 '본생경'은 고갱의 '설교 후의 환상' '황색 그리스도'에서 모티프를 끌어냈다. 색경의 설치로 공간을 구획, 전생과 업에 대해 얘기한다. 작가는 예술적 실험으로 전생과 현실이 연결되는 공간으로 재설정한다.

영화제작자 겸 CF 감독 마르코 브람빌라은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에서 각각 다른 공간의 인물들이 다른 시간 속에서 부유하는 것과 달리 3D 작품 'Evolution'을 통해 삶과 죽음, 욕망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프라다의 패션필름을 제작한 양푸동은 'Lock Again 다시 갇히다'에서 방황하는 두 남자의 여정을 통해 중국의 자본주의 현상에 따른 이상과 현실의 문제를 다룬다. 자유에 대한 꿈과 현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만 또 다른 정체성의 혼동이 따르는 점 등이 고갱의 상징주의의 기저와 맞닿아 있다.

미국 팝아티스트 라샤드 뉴섬의 '그늘진 구성'은 아프리카, 중남미 문화속에 깊숙이 스며든 신체적 언어, 제스처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고갱의 '타히티의 여인들'에 나타나는 미묘한 시선은 그의 영상 작품에서 흑인 여성들의 냉소적인 표현과 당당한 제스처로 신분의 존재성이 교차된다.

노재윤 '본생경'
임영선의 아름다운 꽃에서 피어나는 한 폭의 인물은 고갱의 타히티의 작품에 보이는 낭만적 접근에과 유사하다. 그러나 고갱 작품에서 자연의 낭만적 환상과 타자의 시각이 내재한다면, 임영선의 작품세계는 낭만주의적 접근에서 시작되지만 시대정신과 현실을 인식함으로써 타자가 아닌 공동체로 예술적 실천을 모색한다.



박종진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