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자유 보호위해 걸핏하면 공권력 투입 요청… '인간소외' 값비싼 대가 치러

“거품 공간” (bubble space) 이란 말이 있다.

거품 하면 세제를 풀어 빨래할 때 나는 작은 거품을 생각하는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이런 작은 거품 말고, 사람 하나 둘 정도 는 넉넉히 들어갈 만한 큰 거품을 상상해 보시라. 우리가 보기에는 하찮아 보이는 거품 만들기 같은 일에 일생의 정열을 바치는 기인들 덕에 TV화면을 통해서 이런 큰 거품을 본 적이 있다.

아무튼 거품 공간이라는 말의 의미는 우리 인간은 누구나 그 안에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일종의 투명 거품처럼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자기만의 심리 사회적인 절대공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인데, 인류학자들이 관찰에 따르면 인종 마다 다른 크기의 거품 공간을 필요로 한다고 한다.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미국인의 거품 공간은 유난히 크다. 나만한 사람 열 명 정도는 넉넉히 들어갈 만큼 말이다.

나는 한국에서 인구 밀도 높은 것으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영등포 토박이 출신이다. 주말에 영등포역 주변 길들을 걸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조금 과장해서 두 세 발자국 띠고 한 번 정도 꼴로 사람들이 치고 지나가는 것은 예삿일이다.

물론 열에 아홉 명꼴은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바람과 같이 사라진다. 한데 이곳에 왔더니 미국 사람들이 아직 가까이 갈려면 적어도 여섯 일곱 걸음 정도는 족히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Excuse me!" 를 외친다. 문자 그대로 하면 ”실례 합니다“이며 이 상황에서는 ”앞 잘 보고 다니시오“ 라는 경고 정도로 해석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상황 파악이 잘 않되 그냥 몇 발자국 직진하다 미국인들의 아주 신경질적인 반응을 경험한 적이 몇 번 있었다.

처음에는 이 사람들이 인종차별 하나 하고 잠시 오해 한 적도 있었고, 아무튼 길가다 몸 부딪치는 것 정도는 예사로 알면서 별 불평 없이 살아온 나와는 비교가 안 되게 훨씬 큰 미국 사람들의 거품공간을 이해하게 되는 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그들의 상대적으로 큰 거품공간의 필요성이 암시하듯이 대다수의 미국 사람들은 자기만의 사적인 공간을 유지하는 자유에 굉장히 민감하다. 이 권리가 침해될 시는 심지어는 공권력 투입도 불사한다.

■ 한밤중 눈싸움하다 경찰에 강제 해산돼

오륙 년 전인가, 버지니아 주 리치몬드 시에 위치한 학교 기숙사에 살 때 일이다. 겨울에 눈 보기 어려운 그 지역에 밤새 함박눈이 왔다.

당시 기숙사 살던 나를 포함한 우리 기숙사 학생들이 온통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던 것은 불을 보듯 훤한 일이었다. 게다가 우리 중엔 태어나서 눈을 처음 본 가나에서 유학 온 어린아이같이 순진한 눈망울을 가진 중년의 아프리칸 아저씨들도 몇몇 있었다. 한 밤중에 뛰어나와 눈싸움에, 쓰레기통 뚜껑 뒤집어서 급조한 썰매타기에 우리가 좀 시끄럽게 굴긴 했던 것 같다.

다 큰 성인들이 벌인 한밤중의 즐거운 소동, 이십 분도 채 되지 않아 누군가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는 비운을 맞고 말았다. 사실 미국 사람들 이런 종류의 개인권리 침해 사례에 대해 대단히 민감히 반응한다.

한국에서 트럭을 몰고 골목골목을 다니며 마이크에 대고 “왔어요!” 를 외치던 한국의 야채 생선 파는 아저씨들, 아예 멘트를 녹음해서 반복하여 틀어대며 소음에 유난히 민감한 나의 인내심의 한계를 테스트하곤 했었는데, 이곳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밤이고 낮이고 가정용 가라오케 마이크에 대고 그 골목 사는 모든 이웃을 강제동원 관중 삼아 구성진 뽕짝을 불러대시던 우리 동네 아저씨, 방음 장치 잘된 개인용 가라오케 룸이라도 있다면 몰라도 역시 이곳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장 쥐도 새도 모르게 누군가의 신고가 들어가고, 바로 경찰이 출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 올빼미 총각도 공적 해결로 잠잠

다짜고짜 신고부터 하는 공권 만능주의가 처음엔 영 적응이 안됐었는데 이곳에 한 십년 가까이 살다 보니 이런 것의 편리한 점도 보이긴 한다. 예를 들면 나의 집 위층에 사는, 이 근처 대학교에 다니는 걸로 생각되는 이웃 총각은 새벽 한시면 어김없이 활동을 시작하는 올빼미 형 인간이다.

사람 사는 스타일도 여러 가지려니 하며 밤 도깨비가 따로 없이 쿵쾅거리는 것 까지는 꾹 참아 주었는데, 이 윗집 총각이 하루가 멀다고 친구들을 불러 시끄럽게 파티를 하는 것이다. 그것도 꼭 새벽 한시를 시작으로.

‘한국식’으로 참고 또 참고 한 이 주일을 잘 참았는데, 어느 날은 이 총각이 새벽 네 시가 넘어 다섯 시가 되도록 파티를 하는 것이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죄 없는 머리카락만 쥐어뜯다가 거의 미칠 지경이 돼서야 뭘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도 없이 무작정 위층으로 올라간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총각이 내 노크 소리를 듣고도, 내가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면서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이었다.

사실 맘 여린 내가 싸우러 간 것도 아니었고, 제~발 잠 좀 자게 해달라고 사정하려 간 거였는데. 잠을 못 자 빨갛게 핏발 선 토끼눈을 하고 다니기를 며칠 만에 큰 결단을 하고 학교 관리 사무실에 가서 공식적으로 중재를 요청했다. 뭘 어찌 말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윗집 총각 그 이후 조금 조용해 졌다

. 아직도 밤새 파티를 하긴 하지만 횟수도 줄었고, 이전보다 훨씬 ‘작게’ 떠든다. 한국식으로 ‘맞대면’ 하여 해결하려 했으면 자칫 큰 소리 나고 감정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었는데, 미국식 중재인을 통한 공적 해결 뒤끝 없이 깨끗해서 좋았다.

■ 낮에 문 열어 놓은 집은 한국인 가정

공적 해결이란 것이 좋기는 한데, 한편 찜찜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사실 나 아직 그 윗집 총각 얼굴도 모른다. 각자 자기 방문을 꼭꼭 안으로 쳐 닫은 채 개인 생활의 신성함이란 보장된 안전함 속으로 숨어버리는 대다수의 미국 사람들. 사생활 보장 또는 개인의 자유 존중 이란 뿌리 깊은 전통을 지키기 위해 많은 미국인들은 인간 소외란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미국 생활 참 외롭다. 이 외로움 때문일까, 나는 우리 동네에서 낮에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사는 몇몇 안 되는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문 열어놓고 사는 이 동네 사람들 거의 열이면 열 다 한국 사람들이다. 가끔 내 방을 찾는 미국 친구들이 문 열어 놓고 사는 나를 보면 기겁을 한다.

강도라도 들면 어쩔 라냐고 걱정하면서. 옆 동네에서 연쇄 강간사건이 있단 날 겁도 나지만 아직도 꿋꿋이 문 열어 놓고 살고 있다. 아주 가끔은 한국 옆집 아저씨의 구성진 가라오케 노래 소리가, 그리고 트럭 아저씨의 “왔어요! 사세요!” 소리가 그리울 때가 있다. 지지고 볶고 울고 짜고 시끌벅적 사는 것, 뭐 이런 것이 진짜 사람 사는 맛이 아닐까?

■ 나종미 약력

나종미 씨는 1998 년 미국으로 유학 와서 프린스톤 신학교 기독교 교육석사, 유니온 신학교 신학석사를 마치고 현재 클레어 몬트 신학교 기독교교육학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며 문화전문자유기고가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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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종미 자유기고가 najongmi@netzer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