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림체의 난중일기 '330여척'으로 오독… 울돌목 '쇠줄(鐵索)' 설치한 증거도

왼쪽은 <난중일기> 친필 초고본. 오른쪽은 정조 때의 <이충무공전서> 5책, 권8, 난중일기4. 친필의 “적선133척”이 “적선330여척”으로 왜곡됨.
놀랍고 감동적이며 세계적 해전을 다룬 영화 명량으로 인해 우리 사회에 ‘이순신 신드롬’이 일고 있다. 비록 명량대첩 이후 수백 년이 흘렀지만, 그분의 큰 은덕을 입은 우리 후손들로서는 당시 전쟁 상황에 대해 허구와 왜곡, 축소나 과장이 아닌 보다 정확한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을 치른 후 몹시 피곤한 상태임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그날의 상황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러나 내일 일을 장담하기 힘든 전장에서 만에 하나 적에게 일기가 넘어갈 경우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는지, 일기의 글씨체는 매우 심한 흘림(草書)체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그러한 강한 초서체는 전문가들조차 무슨 글자인지 판별하는 일이 쉽지 않다. 예를 들면, 필자는 중국 중산대학 진위담(陳煒湛) 교수가 쓴 초서체 글 중 몇 글자를, 또 다른 중국의 초서체 전문가 한 분이 오독하는 것을 직접 본 경험이 있다.

<난중일기> 잘못 해독

임진왜란(1592~1598)이 끝나고 한참 뒤 1795년, 정조대왕이 이순신 장군의 일기 등 유고를 정서체로 판독 후 간행할 것을 유득공(柳得恭)에게 명했다. 이른바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간행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교서관(校書館)에 국(局)까지 설치해주었음에도 해독에 애를 먹자, 담당관들은 자신들이 해독할 수 없는 일부 문구는 임의로 삭제하고, 또 여러 부분에서 글자를 잘못 읽는 등의 실수를 범했다.

영화 '명량' 스틸컷
그림의 붉은색 부분에서와 같이, 명량해전이 일어났던 1597년 음력 9월 16일 이순신 장군은 친필로 “적선 133척(賊船一百三十三隻)”이라 썼는데, 정조 때의 정서체 간행관들은 “적선 330여척(三百三十餘隻)”으로 잘못 읽었다. 그리고 그 실수가 이번 명량 영화로 이어졌다. 영화 제작진들은 아마도 페르시아와 그리스 간의 살라미스 해전을 다룬 <300: 제국의 부활>을 경쟁작으로 의식한 때문인지, 정조 때 오판한 숫자 330을 채용, 정확한 고증에는 실패했다.

친필초고의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早朝, 望軍進告內,“賊船無慮二百餘隻, 鳴梁由入直向結陣處”云(이른 아침, 망군이 안으로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무려 2백여 척이 명량으로 아군이 진을 치고 있는 곳을 향해 곧장 들어오고 있습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충무공전서>본에서는 ‘望軍(망군)’을 ‘別望(별망)’으로 기재하고, ‘內’자는 빠뜨리고, ‘無慮二百餘隻(무려 2백여척)’은 어이없게도 ‘不知其數(부지기수)’로 잘못 판독하였다. 이런 식의 오판과 왜곡이 이번 영화에 반영되었기 때문에, 명량대첩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필히 제대로 판독된 난중일기를 봐야 한다.

다행히, 강흘림체의 <난중일기> 원본은 1935년의 <난중일기초> 작업과 1960년대 이은상 선생이 동방고서국역회장을 맡을 당시 전문 한학자들과 함께 국역하고, 최근에는 초서체 전문가 노승석씨의 정자화 DB 작업 등을 거쳐, 정조 때의 것보다 훨씬 더 정확한 모습으로 일반에 공개되어 있다. 그러한 오랫동안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명량해전 당일 충무공의 기록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난중일기 친필본 9월 16일자 내용

명량해전이 일어난 진도대교 아래 울돌목.
16일 갑오(갑진의 잘못), 맑음. 이른 아침, 망군이 안으로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무려 2백여 척이 명량으로 아군이 진을 치고 있는 곳을 향해 곧장 들어오고 있습니다”고 하였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전날 15일에 말한 바 있는 약속사항(“너희 각 제장들은 살려고 마음먹지 말라”, “조금이라도 영을 위반한다면 군율에 처할 것임”)을 거듭 설명하였다. 그런 후 돛을 올려 바다로 나갔는데, 적선 133척이 우리 배를 둘러쌌다.

대장선이 홀로 적선 가운데로 들어가 포환과 화살을 바람과 우뢰처럼 발사하였는데, 여러 배들은 관망하고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일이 장차 어찌될지 예측할 수 없었다. 배 위의 사람들은 서로 돌아보며 안색을 잃었다. 나는 편안하게 해결책을 말했다. “적선이 비록 1000척이라도 적이 우리 배를 곧바로 치지는 못할 것이니 절대 자극을 받아 동요치 말고 있는 힘을 다해 적에게 발사하라.”

여러 배를 돌아보니 이미 한 마장(5리나 10리가 못되는 거리)쯤 물러가 있고, 우수사 김억추(金億秋)가 탄 배는 멀리 물러가 묘연하다. 배를 돌려 곧장 중군 김응성(金應諴)의 배에 대고 먼저 목을 베어 효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는 차차 더 멀리 물러갈 것이고 적선은 점점 다가와 낭패를 당할 상황인지라, 중군령하휘(中軍令下麾)와 초요기(招搖旗)를 세우니 김응성이 점차 내 배로 다가왔다. 거제현령 안위(安衛)의 배도 이르렀다. 나는 뱃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네가 억지로 군법에 죽으려 하느냐?”고 말했다. 재차 불러 “안위야! 감히 군법에 죽고 싶으냐? 물러가면 살 수 있겠느냐?”고 호통 치니, 안위가 황망해하며 곧장 적에게 돌입했다.

교전하는 때에 적장선과 다른 두 척의 적선이 개미떼처럼 안위의 배에 달라붙었다. 안위의 격군(格軍) 7~8명이 물에 몸을 던져 헤엄치는데 거의 구할 수 없었다.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안위선으로 들어갔다. 안위선의 사람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마구 공격하였으며, 내가 탄 배 위의 군관들 또한 비오듯 난사하니 적선 두 척이 남김없이 다(적장선 포함 세 척) 토벌되었다. 천행이요 천행이다. 에워쌌던 적선 30척 또한 당파(撞破)되니, 여러 적선들이 맞서 겨룰 수 없어 다시는 침범해오지 않았다. 같은 곳에서 머무르려 했으나 물이 빠져 큰 배에는 적합하지 않아 진을 건너편 포구로 옮겼다가 달빛을 타고 당사도(唐笥島)로 이동 정박한 뒤 밤을 지새웠다.

이충무공전서 편집 시 추가된 부분

정조 때 <이충무공전서>를 작업하는 과정에서, 담당관들은 입수된 다른 자료들이 있었던지, 위 적장선 포함 3척이 토벌되는 이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9월 16일자 난중일기에 추가하였다.

“녹도만호 송여종(宋汝悰)과 평산포대장 정응두(丁應斗)의 배가 연이어 도착, 힘을 합해 적을 쏘았다. 항복한 왜인 준사(俊沙)란 자는 이전에 안골포 적진에서 투항해 온 자이다. 그가 내 배위에서 굽어보다가 “저 화문(畫文) 붉은 비단옷을 입은 자가 예전 안골진의 적장 마다시(馬多時)다”라고 외쳤다. 나는 김돌손을 시켜 뱃머리로 끌어올리게 하였는데, 준사가 펄쩍펄쩍 뛰면서 “마다시다”라고 하는 고로, 즉시 명령하여 갈기갈기 찢어 죽이니 적의 기운이 크게 꺾이었다. 우리 여러 배들이 일시에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나란히 나아가면서 각자 지자포와 현자포를 발사하고 화살을 빗발같이 쏘아대니 그 소리가 산하를 진동시켰다. 적선 30척이 당파되자 남은 적선들이 퇴주(退走)하고 다시는 감히 우리 군대에 접근하지 못하니 이는 실로 천행이다.”

명량해전 후 충무공의 장계 내용

1597년 11월 10일자 조선왕조실록에는 충무공이 전선 13척으로써 대승을 거둔 명량해전과 관련하여 왕에게 올린 보고서가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 병선과 병기가 거의 다 유실되었습니다. 신이 전라우도수군절도사 김억추 등과 전선 13척, 초탐선 32척을 해남현 해로에 수습하여, 전략상 중요한 입구(울돌목)를 파절(把截: 지켜서 차단)하고 있었사온데, 적의 전선 130여 척이 이진포(梨津浦) 앞바다로부터 우리 진을 향해 들어왔습니다. 신이 수사 김억추, 조방장 배흥립(裵興立), 거제현령 안위 등을 독려하여 각기 병선을 정돈, 진도 벽파정 앞바다에서 적과 교전,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웠습니다. 대포로 적선 20여 척을 쳐부수고 사살한 것도 심히 많아 적의 무리들이 바닷물에 떠다니고 익사하였으며, 참수자도 8급이나 되었습니다.

적선 중 큰 배 한 척이 우보와 붉은 기를 세우고 청라장(靑羅帳)을 두르고서 여러 적선을 지휘하여 우리 배를 에워싸는 것을 녹도만호 송여종과 영등만호 정응두가 연이어 도착하여 힘껏 싸워 또 적선 11척을 파괴하자 적이 크게 좌절되었고 나머지 적들도 멀리 물러갔습니다. 당시 저희 진중에 투항해온 왜인이 붉은 기의 적선을 가리켜 안골포의 적장 마다시라고 하였습니다.”

울돌목에 쇠줄을 설치한 증거

이상의 기록에 따르면, 명량해전 당시 적을 파괴한 주요 수단은 대포와 화살이다. 일찍이 고 이종학(李鐘學) 독도박물관장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1904년 일본해군의 소이번 오가사와라 중좌가 쓴 <일본제국 해군권력사 강의>라는 책에는 李장군이 명량해전에서 쇠사슬을 늘어트려 일본배를 침몰시켰다고 전하는 등 일본학자들 상당수가 쇠사슬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나 난중일기나 명량대첩 장계에는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없다”면서 “이에 대한 철저한 연구도 시급하다”고 강조한 적이 있다.

그 후 순천향대 임원빈 이순신연구소장이 줄곧 “이순신의 명량해전 철쇄설치는 설화일 뿐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KBS 역사스페셜 46회 ‘명량대첩의 비밀’ 편에서 “무게 4톤의 쇠사슬이면 60여명에서 100여명의 인력이 충분히 감아올릴 수 있는 무게”라고 계산, 많은 이로 하여금 4톤의 쇠사슬 사용에 회의감을 갖게 했다. 그 결과, 이번 영화에서는 쇠줄에 대한 언급이나 장면이 완전히 배제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명량해전에서의 쇠줄 설치는 허구이며 그와 관련한 신뢰할만한 증거자료는 없을까? 있다.

명량대첩 당시의 쇠줄은 ‘鐵索(철삭)’이라 하는데, 철사를 몇 가닥 꼬아 만든 와이어로프이다. 따라서 지름 1.4㎝로 계산하면 약 300㎏ 정도이니 소수 인력으로 운용 가능하다. <이충무공전서> 권14에 실린 해남현지(海南縣志)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명량은 우수영에서 3리 떨어진 곳에 있다. 물살이 세차고 빠르며, 파도 소리는 천둥 치는 소리 같다. 명량해협 양변에는 돌산이 빽빽이 몰려 서있으며 항구는 매우 좁다. 충무공께서는 鐵索을 수중에 橫截(횡절)하였는데, 명량은 마치 호리병의 목처럼 좁아 적선이 여기에 이르면 철삭에 걸려 전복되는 것이 부지기수였다. 양변 바위 위에는 철삭을 박았던 구멍이 지금까지도 완연하며, 사람들은 모두 이곳을 가리켜 이충무공이 철삭을 설치하여 왜적을 몰살시킨 곳이란 의미의 ‘이충무설삭살왜처(李忠武設索殺倭處)’라 부른다.”

이는 당시 국가관청에 의한 실사 확인 기록으로 1차 사료에 준하는 증거자료이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이 왕에게 올린 앞의 보고서 내용 중, “울돌목을 把截(파절)하고 있었습니다.”의 ‘截’은 위 <해남현지> 기록 “鐵索橫截”의 준말로 봐야 한다. <송사(宋史)> 장영덕전(張永德傳)에는 “철삭 천여척(약 300m)으로 장회(長淮)를 橫截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명량에서 가장 좁은 곳의 너비는 294m로 위 송사의 기록 300m와 거의 같다. 따라서 명량대첩 전에 울돌목에 쇠줄을 설치했다는 기록은 신뢰할만하다. 울돌목이 뚫리면 곧바로 한양이 위험해지는데, 철두철미한 지략가 충무공이 방책 상 철삭을 설치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는 시각은 오해이다. 다만 <난중일기> 기록으로 볼 때, 전투가 벌어진 곳은 울돌목에서 조금 아래쪽인 벽파정 앞바다였으니, 적선들은 쇠줄이 설치된 울돌목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글ㆍ사진= 박대종 대종언어연구소장

[박대종의 어원이야기] 鳴梁(명량)

‘鳴’ 우는 소리 내며 날아가는 화살… ‘梁’ 좁은 해협, 청동기 금문엔 ‘다칠 창’

1597년 음력 9월 16일에 벌어진 명량해전을 다룬 영화 ‘명량’이 연일 관객수 신기록을 수립하며 흥행 태풍을 일으키고 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리더십이 실종된 어지러운 현 시대에 이순신 장군 같은 영웅의 출현을 갈망하는 국민들의 마음이 크게 작용한 때문일 것이다.

鳴梁(명량)은 전남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와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사이의 좁은 해협이다. 병목처럼 좁은 곳이어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서는 ‘項(목 항)’자를 덧붙여 ‘鳴梁項(명량항)’으로 기록하였으며, 명량항은 토속어로 풀이된 ‘울돌목’으로도 불려 왔다. 이 울돌목 명칭에서의 ‘돌’은 ‘돌(石)’이나 ‘돌다(回)’와는 무관한 ‘도랑’의 옛말인데, 영화에서는 ‘소용돌이’로 잘못 설명되고, 나아가 승리의 전략 또한 소용돌이로 잘못 설정되었다.

鳴(울 명)은 새(鳥)가 소리(口)내어 우는 모습을 형용, ‘울다’를 뜻한다. 명량에 ‘鳴’자가 덧붙여진 연유에 대해 1750년대의 <해동지도(海東地圖)>에서는 “水疾如箭(수질여전: 물살이 화살처럼 빠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해를 돕기 위해 부연설명하면, 여기서의 ‘箭(화살 전)’은 우는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명적(鳴鏑)’으로, 명량의 급류를 우는 화살에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鳴梁에서의 梁(량)은 ‘들보’가 아닌 ‘돌(도랑)→바닷도랑→좁은 물길(海峽)’의 뜻으로 쓰였다. 한산해전의 배경지인 견내량(見乃梁), 조선 수군이 패한 칠천량(漆川梁), 왜적과의 마지막 격전지인 노량(露梁) 모두 명량처럼 좁은 해협이다. 청동기 금문을 보면 梁은 본래 木자가 없는 형태로, 水(물 수)와 刃(칼날 인)에 점 하나가 더 붙은 ‘다칠 창’으로 이루어진 물과 관련된 글자였다. 물고기를 잡기 위해 강에 돌 따위를 쌓아 폭을 좁게 만들면, 물고기는 그 좁은 통로로 몰릴 수밖에 없다. 그처럼 좁은 물길(梁)을 우리 조상들은 ‘돌’이라 불렀다. <두시언해(杜詩諺解)> 초간본 7:5의 “고기 잡는 돌”, <여사서언해(女四書諺解)> 2:17의 “梁은 고기 잡는 돌이니” 기록이 그 증거다. 폭이 급격히 좁아진 도랑의 물살은 거세다. 거센 물살의 도랑에 빠지면 다칠 위험이 있으니, 그것이 ‘梁’에 ‘다칠 창’자가 쓰인 연유이다.

그처럼 고기 잡는 바닷도랑(梁)의 길목에서 지금은 울돌목의 거센 물살을 따라 몰려드는 숭어들을 주민들이 뜰채로 잡아 올리고 있지만, 충무공은 그날 13척의 배로 적선 133척을 잡아 우리 민족을 위기에서 구해냈던 것이다.



글·사진=박대종 대종언어연구소장 www.hanj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