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내 손으로 들어오니, 수액이 내 팔로 올라왔네. 나무가 내 가슴 속에서 아래를 향해 자라니, 가지들이 나에게서 뻗어 나오네, 두 팔처럼. 너는 나무, 너는 이끼, 바람이 그 위를 스쳐가는 오랑캐꽃들. 너는. 너는 어린이-그렇게도 키가 큰-세상 사람들에겐 이 모든 것들이 어리석어 보이겠지만.”<파운드(E. L. Pound) 詩, 소녀, 정규웅 옮김, 민음사>
대나무 통을 재료로 한, 세 개의 원(圓)은 성부-성자-성신 삼위일체와 천-지-인 조화를 표현하고 있다. 옆으로 뻗어가는 땅속줄기의 영양분에 충실하여 마침내 곧게 자라는 생장속성을 비유하듯 하단의 직선으로 깔린 것 역시, 죽(竹)이다. 그 속엔 우주의 신비로움에 휩싸인 블랙홀처럼 아득한 시간의 비밀을 찾아 먼 여행을 떠나며 낭랑한 소리의 빛깔을 내는 원들이 춤추듯 회전하며 초월성을 암시한다.
작가는 “조물주의 심령으로 바라보고자 했다. 속이 빈 대나무 통은 우주의 오묘하고 웅장한 소리를 인간내면에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묘사했다. 가령 변함없는 사랑과 생명, 순수한 내면의 음성 그리고 빈 마음…”이라 했다.
화면 바탕인 삼베는 태어남과 돌아감을 품은 광막하고 엄숙한 대지다. 삶을 되돌아보며 성찰하는 그 위에 상처에서 나오는 수액인 옻, 한옥토담의 정감을 자아내는 황토를 얹는다. 또 진주조개는 마치 태생적 아픔을 승화시키듯 아득한 시간 동안 지구에 살아 온 우아한 빛깔의 영성(靈性)을 내뿜는다. 자개의 오색영롱함은 영혼의 빛나는 생령처럼 인생의 은밀한 성숙함과 연결되어 사방에 다다른다. 비움 속 피어나는 영원한 생명과 창조성으로 집약되는 신창세기(Re-Genesis) 작품세계는 작가의 신앙심과 연결되어 있다. 곧 신이 준 축복받은 최초의 형상 그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서울시 강남구 언주로 소재, 디자인 인재들이 꿈과 열정을 키워 나가는 사디(sadi, samsung art and design institute) 인근 한 카페서 수년 만에 작가와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직관적인 작업을 하는 화가다. 에스키스나 또 삼베, 캔버스 등에 밑 작업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구상한다. 망치면 끝이지만 또 그것이 완성이 된다. 대작(大作)도 빨리 끝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소품이라도 오래 걸릴 때가 있는데 마음과 직관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런 방식에 대해 나는 별로 불만이 없다. 감정을 맑게 유지한 상태에서 몰입한 후 이미지가 떠오르는 대로 나간다. 때문에 작업시간에 대해서 구애받지 않는다. 안 풀리면 그대로 두었다가 나중에 보아서 다시 떠오르면 그때 작업하여 완성 한다”라고 밝혔다.
이정연 작가는 이화여중ㆍ고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을 수료했다. 1983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프랫대학원에서 판화와 회화로 미술석사학위(MFA)를 받았다. 이후 콜롬비아교육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는데 유화와 아크릴, 판화, 사진, 세라믹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다.
유학가기 전, 한지 위 비구상 동양화작업으로 국전(國展)에 두 번 입선했다. 1993년 귀국하여 다시 한국적인 작업을 추구했었는데 2000년도 즈음 화면에 부조형식이 나타난다. 그리고 점점 진화하여 삼베 위 옻칠과 황토작업 등으로 전환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삼성 아트 앤 디자인 인스티튜트(SADI) 부학장으로 기초학과에서 드로잉을 지도하고 있다.
권동철 미술전문기자 @hankooki.com
#사진캡션
신창세기(Re-Genesis), 259×194㎝ 삼베 위에 옻칠과 자개, 칠가루, 숯가루, 2006
△(좌)=162×130㎝ △(우)=72.7×91㎝
이정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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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동철 미술전문기자 dckewon5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