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이익 보호 외치며 잇속 챙겨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반대 입장을 밝혀온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와 삼성은 19일 합병을 놓고 첫 법정 공방을 벌였다. 서울 서초구 삼성물산 서초사옥 모습.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반대하며 현물배당 시도
삼성 핵심인 전자 지배력 높여 경영 간섭 의심
소버린 사태와 유사… 취약한 지배구조 타깃
대기업 경영권 방어수단 도입 필요성 제기돼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는 최근 삼성물산 지분을 7.12%로 끌어올린 뒤 공개적으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반대했다. 이어 지난 11일 삼성물산이 자사주 전량을 KCC에 매각한 것을 문제삼아 서울중앙지법에 주총 결의 금지와 자사주 처분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재계에서는 수십조원을 굴리는 헤지펀드 엘리엇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반대하는 이유를 놓고 여러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시세차익을 노린 먹튀냐, 아니면 그룹 경영간섭을 통해 소기의 목적을 챙기려는 몽니냐로 견해가 좁혀지고 있는 가운데, 일각에선 엘리엇 측이 합병에 반대하는 속내가 단기차익 말고 따로 있을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엘리엇의 목표는 삼성전자?

엘리엇은 삼성물산 지분 7.12%를 확보한 뒤 삼성물산의 가치가 과소평가됐다며 합병 반대를 주장했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비율은 1대 0.35로 이는 제일모직 주식 1주 가치가 삼성물산 주식 3주와 맞먹는 것으로 현 합병 계획대로라면 삼성물산 주주들의 이익에 반한다는 것이다. 이에 근거해 엘리엇은 삼성물산 측에 제일모직과의 합병비율을 5배 가량 올려달라고 요구했다. 삼성물산 자산이 제일모직보다 3배 이상 많다는 이유에서다.

이같은 엘리엇의 주장은 3 대 주주로서 자신들의 요구에 대한 목소리를 낸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뒤에 엘리엇이 취한 조치를 보면 주주제안을 통해 현물배당이 가능하도록 정관 변경을 요구했는데, 이 부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엘리엇이 주주의 권리로서 합병에 반대하면서 또 다른 한편에서는 현물배당을 요구하는 것은 상충되는 측면이 있다는 분석으로 현금배당이 아닌 현물배당을 요구하는 것은 삼성물산이 보유한 계열사 주식을 배당 대가로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삼성물산은 그룹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의 지분 4.1%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주식가치로 14 조원에 달하는 지분이다. 때문에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력 강화를 목적으로 삼성그룹 지배구조 재편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엘리엇이 삼성전자의 지분을 배당으로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결국 엘리엇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반대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삼성그룹의 핵심인 삼성전자가 목표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배경이다.

이러한 시나리오대로라면 삼성과 엘리엇의 경영권 분쟁이 장기전으로 갈 수도 있는데, 삼성전자 지분 확보가 엘리엇의 진짜 속내라면 합병 이후에도 현물배당 같은 요구를 지속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해 주주로서 다양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합병 삼성물산이 향후 그룹 지주사로서 역할을 한다면, 나중엔 그룹 전반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목소리를 내며 경영간섭을 할 수도 있다는 예상이 가능하다.

이는 엘리엇이 과거 SK그룹 경영간섭에 나섰던 소버린의 길을 따라갈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다. 소버린 자산운용은 2003년 SK(주) 지분14.99%를 매입해 2 대 주주로 올라선 뒤, 계열사 청산이나 경영진 교체를 요구하고,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추진하는 등 경영간섭에 나선 바 있다. SK 는 당시 1 조원 가량을 투입하고, 온갖 백기사들을 동원해 간신히 경영권을 방어했지만 소버린은 보유지분을 매각해 수천억원의 차익을 챙겼다.

소버린 사태는 여러 면에서 이번 엘리엇과 삼성 간의 소송과 유사하다. 소버린과 경영권 분쟁 중이던 SK는 2003년 12월 자사주 9.7%를 우호 세력인 하나은행에 매각했다. 당시 법원은 적절한 경영권 방어 행위로 보고 소버린의 의결권 침해 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19일 엘리엇과 삼성 측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비율 적정성, 자사주 의결권 행사에 대한 불법 여부 등을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삼성물산이 자사주를 KCC에 매각한 과정이 쟁점으로 부각됐다.

소버린 판례를 보면 삼성이 유리해 보인다. 대형 로펌의 한 변호사는 "자사주 매각을 위한 이사회 소집과 결정이 법적 절차에 따라 이뤄졌다면, 가처분 신청이 기각될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그러나 삼성물산이 자사주 매각시 KCC와 이면계약을 체결했고, 이를 엘리엇이 법정에서 소명한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 의견이다.

대기업 취약한 지배구조 개선돼야

이번 삼성-엘리엇 간 소송은 과거 SK 그룹, KT&G 사례와 같이 한국 기업들이 외국 헤지펀드들의 좋은 타깃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재계는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재발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국내 대기업 오너가들이 적은 지분만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태생적 한계와 관련있다. 엘리엇은 국내 기업의 그러한 부분을 노렸다. 엘리엇이 삼성물산의 지분을 매집한 것은 삼성물산이 삼성 지배구조의 약한 고리란 점을 겨냥한 것이다. 삼성물산의 특수관계인 지분은 삼성SDI(7.18%), 삼성화재(4.65%) 등을 합쳐 13.99%에 불과하다. 단일 최대주주로는 국민연금(9.98%)이 1위다. 반면 외국인 지분은 33%를 넘어선다. 특히 4일 엘리엇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반대하고 나서자 외국인의 삼성물산 보유 비중이 하루 새 32.11%에서 33.08%로 높아졌다. 엘리엇의 지분은 7.12%로 단일 주주로는 3위에 불과하지만 외국계 우호지분을 규합한다면 양상이 사뭇 달라진다.

국내 재벌 기업들이 이처럼 취약한 지배구조를 개선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헤지펀드들의 공격대상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전경련 등 재계 일각에서 줄기차게 요구했던 황금주, 포이즌필 같은 기업 경영권 방어수단을 국내에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이홍우 기자 lhw@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