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도 신데렐라를 꿈꾼다

[영화되돌리기] 러브 인 맨하탄
남자도 신데렐라를 꿈꾼다

신데렐라 스토리는 친자본주의인가? 반자본주의인가? 신데렐라가 자본주의와 무슨 상관이냐 하겠지만 신분을 초월한 낭만적 사랑이 근대 자본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을 고려해 보면 분명 이 둘은 뭔가 꿍꿍이가 있는 관계이다. 한마디로 신데렐라는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일종의 무임승차자(Free Rider)와 같다. 노동력과 자본을 그다지 투입하지 않고서 높은 이윤을 챙기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자본주의의 교환법칙을 무시한 반자본주의적 인간이 어떻게 근대 자본주의의 성립과 함께 등장하게 되었는가?

신데렐라 스토리의 경제적 노선을 정하기 전에 이 이야기의 원형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데렐라처럼 신분상승을 한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 낭만적 사랑은 18세기 소설가 리처드슨에게서 시작되었다. 소설 ‘파멜라’를 통해 리처드슨은 도덕적인 하녀가 방탕한 주인과 결혼을 하는 통속적인 러브 스토리의 전형을 보여준다. 여기서 여자는 비록 계급은 미천하나 정숙하고 신앙심이 깊은 처자이고 남자는 귀족계급이나 호색한에 망나니이다. 이 둘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이 당시 귀족계급의 몰락과 중산계급의 성장을 엿볼 수 있다. 즉, 청교도적 윤리로 무장한 중산계급이 육체적으로 방종한 귀족계급과 사회적으로 등가의 가치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 도덕과 정절이 금전보다 희소성이 큰 자원이므로 (자본주의의 희소성의 원칙에 따라)신데렐라 스토리의 신데렐라와 왕자는 어느 한 쪽이 밑지는 장사를 한 건 아니다.

신데렐라 스토리는 이처럼 신데렐라만 땡잡은 얘기가 결코 아니다. 왕자님 역시 봉잡은 이야기다. 파멜라를 농락하려 들었던 귀족이 정숙한 파멜라를 만나 교화되었듯이 왕자님들은 비천하지만 정숙하고 가난하지만 명랑하고 무엇보다 착한 여자를 꿈꾼다. 그리고 그녀들을 통해서 통속적이고 3류같은 자신의 일상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이 속에는 남자들이 꿈꾸는 여자에 대한 각종 판타지가 버무려져 있다. 결국 신데렐라 스토리는 빈곤한 현실을 도피하고픈 여성들의 판타지가 아니라 풍족하나 어디 하나 모자란 듯한 남자가 찾아 떠나는 오아시스일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제니퍼 로페즈 주연의 영화 ‘러브 인 맨하탄’에도 신데렐라를 꿈꾸는 남자의 판타지가 담겨 있다. 여자 주인공은 호텔 여급이자 유색인에다가 유부녀. 그녀가 빠지는 남자는 상원의원에 입후보한 입지전적의 정치인이자 앵글로 색슨계 백인이다. 사실 그녀는 왕자님을 꿈꾸지 않았다. 다만 얼떨결에 사랑에 빠지고 만 남자가, 알고 보니 신데렐라를 꿈꾸고 있었다. ‘어딘지 지금 만나본 여자와는 다른’, 사려깊은 엄마이자 솔직한 정치적 조언자, 흙 속의 진주처럼 아직 아무도 발견하지 않은 원석 같은 여인. 남자는 상류층 여자의 속물 근성도 없고 빈민층 여자의 피해의식도 없는 자신만만 당당한 그녀의 매력에 빠져든다. 하지만 과연 이렇게 멋진 신데렐라가 현실에 존재할까? 이 질문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렇게 멋진 왕자님이 존재할까’ 하고 묻는 것과 같다. 답은 둘 다 같다. 결코 존재 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멋진 왕자님이 없듯이 현실에 훌륭한 신데렐라도 없다.

요즘에 신데렐라 이야기로 매스컴이 떠들썩하다. 모두들 그렇게 허황된 왕자를 꿈꾸며 남루한 현실을 도피하려는 여성들에 대해 비난과 충고, 때로는 우려의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정작 더 위험한 판타지는 신데렐라에 있다. 이 가난하지만 멋진 여성상은 여성에게 때론 순결주의를 때론 착한여자 콤플렉스를 그리고 때로는 숙녀와 요부를 넘나드는 멀티플레이어 기질을 강요하지 않는가.

정선영


입력시간 : 2004-08-04 15:17


정선영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