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잘 그리는 아이의 변신템페스트, 밤무대의 '돌풍'

[추억의 LP 여행] 장계현(上)
그림 잘 그리는 아이의 변신
템페스트, 밤무대의 '돌풍'


콧수염 가수 장계현은 비음이 가미된 독특한 허스키 보컬로 포크, 록, 팝, 컨트리, 트로트, 발라드 등 여러 장르의 노래를 다양한 스텍트럼으로 펼쳐낸 아티스트. 아마추어 통기타 가수에서 캄보 밴드의 베이스 연주자로, 록 그룹의 보컬에서 싱어 송라이터로 67년 데뷔 이래 40년 가까이 중단 없는 음악 외길인생을 걸어가는 보기 드문 아티스트. 대부분 록 그룹 연주자들이 미 8군의 클럽을 주무대로 경력을 시작했던 것과 달리 그는 콘테스트를 통해 록 그룹의 보컬이 된 특이한 출발점을 지녔다. 오랜 활동 기간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히트 곡은 젊은 층에 어필됐던 ‘ 잊게 해주오’, ‘ 나의 20년’, ‘너너너’, ‘햇빛 쏟아지는 들판’ 정도. 하지만 ‘나의 20년‘은 당시 청소년 층의 큰 사랑 덕택에 정상의 인기를 누려, 그의 대표곡이 되었다.

독립유공자 출신으로 서울전화국장을 역임했던 부친 장낙수씨와 평범한 가정 주부였던 김명숙씨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1950년 1월 19일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음악하고는 무관한 집안이었지만, 부친은 취미로 바이올린을 연주하셨다. 늦둥이로 태어난 그는 만5살 때 서울 교동 초등학교를 들어갔다. 전교에서 가장 어린 학생이었던 장계현은 친구들과 잘 어울리기 못 했다. 미술에는 재능을 보였지만 음악하고는 아에 담을 쌓았을 정도. 실제로 그는 애국가도 잘 부르지 못했던 아이였다. 대광 중학 시절에도 그림 잘 그리는 아이 장계현은 음악엔 관심이 없었다. 대광고에 진학해서 미술부 활동을 했다. 하지만 잠시 밴드부에 들어가 트럼펫을 부르고 성가부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음악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가수 최헌은 대광고 동기. 고2 때 처음 통기타를 만졌다. 미국에 살고 있는 고모가 스틸 기타를 선물로 주었기 때문. 음악 학원을 다니거나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는 음반이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독학으로 기타를 쳤다.

처음으로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해 준 것은 당시 전 세계적으로 청소년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영국 가수 클리프 리차드. 고 2때 클리프 리차드가 주연을 한 청소년 뮤지컬 영화 ‘ 더 영 원스’를 보고 매료되었다. 그 때부터 클리프 리차드 노래는 물론 외국 팝송을 많이 듣기 시작했다. 홍익대 미대 조소과에 입학한 그는 음악을 하고 싶어 학교 캠퍼스 연주 밴드 ‘ 홍익캄보’의 오디션을 보았다. 베이스 기타를 치고 팝송 ‘커튼 필즈’을 불러 홍익 캄보 2기 멤버로 선발되었다. 당시 홍익 캄보의 리더는 뒷날 록 그룹 ‘동방의 빛’의 리더로 신디사이더를 동원한 무그 음악 시대를 연 1기 강근식이었다. 1기 홍익캄보는 67년 제 2회 전국 남녀 재즈 페스티벌에 출전해 1위를 차지했다. 당시는 팝송을 포함 외국 대중음악은 모두 재즈라고 표현했던 시기였다.

장계현은 대학 2학년 때인 68년, 홍익캄보밴드의 베이스 주자로 제 3회 대회에서 ‘Rag Doll’이란 곡으로 출전했다. 당시 심사 위원은 이백천. 기성 밴드를 능가하는 실력으로 멋지게 연주를 했다. 그런데 프로급의 실력이 문제가 되어 대학생다운 신선함이 없다는 이유로 입상을 못했다. 이 때 페스티벌에서 만난 경희대생 김세환과 듀엣 ‘트리플’을 결성해 잠시 오비스 케빈 등에서 외국 팝송들을 불렀다. 이후 3학년이 되어서는 주간경향이 주최한 전국 아마추어 포크 콘테스트에서 통기타를 들고 출전했다. 결과는 대상 수상. 당시 2등은 홍민, 3등은 유승엽이었다. 콘테스트 대상 수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그는 각종 방송에 불려 다녔다.

미술 작품 또한 인정을 받고 있던 터라 주위에서는 음악 활동을 말렸다. 하지만 당시 콘테스트 주최사였던 주간경향 기자 서병후의 눈에 들어, 윤항기가 리더로 있던 브라스 록 그룹 키 브라더스와 인연을 맺게 되고 창단 멤버로서 반 년 정도 메인 보컬로 활동했다. 주무대는 한국 최초의 고고클럽이었던 닐바나. 이 무렵 키 브라더스 활동시절 다른 팀의 드러머 유상봉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장계현의 노래를 듣고 반한 유상봉이 새로운 팀 결성을 제안해 왔던 것. 그래서 1970년 대학 졸업반 때 록 그룹 템페스트를 함께 창설했다. 그룹 명 템페스트(돌풍)라는 영어에 능통했던 서병후의 작품. 폭 넓은 대중에게 알려지기 전인 1971년, 마장동 스튜디오에서 단 하루 동안 녹음 작업을 해 첫 음반 ‘템페스트 히트곡 제 1집-성음’을 발표했다. 이 때의 템페스트 1기 라인업은 리더이자 드럼에 유상봉, 리드 기타 성정민, 키보드 유강순, 베이스 김영무와 보컬 장계현의 5인조였다. 첫 음반은 대중의 호응을 전혀 받지 못했다. 하지만 닐바나, 풍전, 맙? 센트럴 등 서울의 중요 나이트 클럽을 주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템페스트는 1972년 이후 밤무대의 슈퍼스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인기가 높아진 템페스트는 1972년 10월 시민회관에서 첫 단독 공연을 했다. 당시는 플레이보이컵 전국 그룹 사운드 대회 등 록 그룹들이 시민회관에서 공연을 많이 하던 시절. 하지만 록 그룹의 단독 리사이틀 공연은 이례적이었다. 템페스트의 매니저 역할을 맡았던 주간경향의 기자 서병후는 1973년 전속금 50만원에 오아시스와 음반계약을 맺게 했다. 이즈음 템페스트는 멤버 교체가 있었다. 키보드 박수천과 기타 박종남이 새로 영입되었다. 그래서 템페스트의 첫 히트 곡 ‘ 잊게 해주오’가 수록된 음반이 발표되었다.

입력시간 : 2004-08-25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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