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기억, 3년간의 퍼즐게임

[영화되돌리기] 페이첵
사라진 기억, 3년간의 퍼즐게임

필립 K. 딕 (Philip Kindred Dick)은 30년간 30편이 넘는 장편과 100개 이상의 단편을 발표한 유명한 SF 작가이다. <높은 성의 사나이>로 1963년 휴고상을 받은 그는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이 체제 속에 갇혀, 개인의 정체성을 알 수 없는 암울한 미래상을 표현한 작품을 많이 내놓았다. 이런 그의 독특하고 기발한 미래상은 영화의 소재로도 아주 적합하기에, 헐리웃에서 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대표적으로는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 (1968)>가 리들리 스콧에 의해 블래이드 러너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블레이드 러너는 당시 E.T와 흥행 대결에서 참패를 했지만 현재는 S.F 영화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얼마 전에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내놓아 미국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흥행에 성공했다.

하지만, 필립 K.딕 본인이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봤다면 자신의 글을 토대로 했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자아 정체성의 혼란을 일으키고, 인간이 만들어낸 체제 속에 갇혀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암울한 미래상을 그려낸 그와, 어딘지 모르게 해피 엔딩과 따뜻한 인간미를 지닌듯한 영화를 만드는 스필버그와는 애초부터 맞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필립 K.딕의 작품을 ‘영웅본색‘의 오우삼이 영화로 만들었다면 어떨까? 2003년 그는 벤 애플릭, 우마 서먼과 함께 ’페이첵‘을 내놓았다. 마이클 제닝스(벤 애플릭)는 대단히 머리 좋은 공학자이다. 그는 의뢰를 받아 경쟁회사 제품을 분해하고 분석해서 보다 좋은 기술을 만들어낸다. 단, 조건은 기밀유지를 유해 그 기간 동안의 기억을 삭제해야 한다.

그런데 그에게 엄청난 금액과 3년이라는 시간을 내건 새로운 의뢰가 들어온다. 제닝스는 3년 동안의 기억을 지운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려 고민하다가 의뢰를 받아들이고, 성공적으로 기술을 완성한다. 물론 제닝스 본인은 무엇을 했는지 모르는 채 3년이 지나버렸다. 그런데 그에게 남은 건 거액이 아니라 20개의 소지품이 담긴 봉투뿐이다.

게다가 거액을 포기하고 영문을 알 수 없는 물건들을 남긴 사람이 바로 제닝스 본인이라니! 기억이 없는 그가 물어볼 곳은 프로젝트를 맡긴 알콤사의 CEO 지미. 하지만 연락은 되지 않고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체포된다. 조사를 받던 도중 제닝스는 자신의 봉투 속에 담긴 담배와 선글라스 덕분에 탈출하게 된다. 경찰과 알콤사의 추격을 받으며 그가 알아낸 건 자신을 구해줄 물건이 꼭 20개의 소지품 중에 있다는 것이다.

즉, 제닝스가 만들어낸 것은 미래를 보는 기계였다. 제닝스는 기억이 사라지기 전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퍼즐과도 같은 물건을 자신에게 보낸 것이다. 3년간의 기억이 없는 상황에서 단서는 봉투에 담겨 있는 소지품뿐이다.

페이첵은 필립 K.딕의 상상력이 원천이기에 흥미로운 소재를 지닌 S.F 영화지만 미래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오우삼은 S.F영화라고 하기엔 어색한 추리 액션영화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마이너리티 리포트와 비교되며 혹평을 받았지만 그것은 필립 K.딕의 원작을 너무 고려한 평이 아닐까 싶다.

오우삼의 페이첵은 필립 K.딕의 원작과 그다지 관련이 없어 보인다. 존 앤터톤(탐 크루즈, 마이너리티 리포트)은 데커드(해리슨 포드, 블레이드러너)를 넘어설 수 없지만 제닝스(벤 애플릭)는 그럴 필요조차 없다. 페이첵의 비교대상은 가벼운 오락 영화라고 본다.

정선영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4-10-05 16:10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