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당과 지옥 오간 영욕의 서른둘 야구인생, 새로운 도전에 '박수'

조성민, 인생 재역전을 꿈꾸며 마운드에 다시 서다
천당과 지옥 오간 영욕의 서른둘 야구인생, 새로운 도전에 '박수'

조성민(32)처럼 숱한 영욕을 겪은 야구선수가 또 있을까.

그의 나이 서른 둘. 동료들은 가정을 갖고, 큰 돈을 만지고, 스타가 됐다. 그러나 조성민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 젊었을 때는 모든 것을 가졌었지만, 지금은 죄다 잃었다.

조성민은 20대에 세상 부러울 게 없을 만큼 성공을 맛봤다. 그러나 성공 뒤에는 더 큰 실패와 고통이 기다렸다. 일본 최고 명문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 입단에서 퇴단까지가 그랬고, 톱스타 최진실과의 결혼에서 이혼까지도 그랬다. 어렵게 시작한 제과사업도 실패했고, 한국 프로야구로의 도전 또한 좌절됐다.

모든 것을 잃었던 조성민이 작지만 소중한 목표를 위해 남은 청춘을 불사르고 있다. ‘한화 이글스 불펜투수’라는, 어찌 보면 그리 대단치 않아 보이는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8월15일 광복절. 조성민이 5월5일 한화에 입단한 뒤 100일간의 재활훈련을 거쳐 처음으로 국내 프로야구 1군에 등록된 날이다. 그리고 그의 데뷔전이 펼쳐졌다. 조성민은 현대에 3-5로 뒤진 7회 전격적으로 마운드에 올랐다. “조성민”을 외치는 뜨거운 함성이 수원구장을 뒤덮었다.

조성민은 공 하나하나를 아주 신중하게 던졌다. 몸이 덜 만들어진 탓도 있었고, 퇴단 이후 3년여 만의 실전 등판이라 얼떨떨하기도 했다. 행여 요미우리 시절 수술 받았던 팔꿈치에 다시 통증이 오지 않을까, 혹시 후배 타자들에게 뭇매나 맞지 않을까….

조성민은 조심스럽게 피칭한 끝에 1과3분의1 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그 사이 타선이 전세를 뒤집은 덕분에 조성민은 승리투수까지 됐다. 더없이 통쾌하고, 극적인 데뷔전이었다.

조성민은 이후에도 3경기 동안 무실점 투구를 이어갔다. 그는 부상 경력 탓에 선발로 던지지 못하고, 불펜에서 짧게만 피칭하고 있다. 게다가 구속도 전성기보다 시속 10㎞정도 줄어들어 타자를 압도하지는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조성민의 미래를 밝게 전망하고 있다. 구위가 뛰어나지는 않지만 변화구 구사능력과 제구력은 분명 한 수 위이기 때문에 시속 140㎞안팎의 직구로도 타자들을 충분히 농락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조성민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상대 타자에게 적잖은 부담을 준다는 평가다.

조성민은 야구선수로 다시 태어났다. 야구팬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그를 ‘최진실의 남편’에서 ‘한화 조성민’으로 인정했다. 잡다한 사생활이 아닌 그의 승리와 기록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다시 유니폼을 입을 수 없을 것 같던 조성민이 그라운드로 돌아오자 야구판은 금세 뜨거워졌다. 그가 2군에서 재활 훈련을 할 때부터 언론의 관심이 몰렸고, 그가 첫 승을 거둔 날 각종 매스컴은 조성민 소식으로 도배를 했다.

조성민은 프로 구단으로부터 지명을 받지 못해 신고선수(연습생) 신분으로 한화와 연봉 5,000만원에 계약했다. 그러나 한화는 지금까지 조성민으로 인해 얻은 홍보효과가 수십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백전불굴의 의지로 재기한 조성민이 커다란 호감을 얻고 있다는 분석이다.

관중동원 능력도 대단하다. 어느 구장을 가도 한화 경기에는 ‘아줌마 부대’ 수십명이 불펜 위쪽에 자리를 잡고 언제 등판할지 모르는 조성민만 기다린다. 경기가 끝나면 출입구에서 그를 기다리는 팬들 또한 상상 이상이다. 요미우리 시절 팬이었던 일본인 여성들이 한국을 찾기도 했다. 인기만으로 보면 조성민이 프로야구 최고라고 할 만하다.

사실 다른 구단들도 투수로서, 상품으로서의 조성민을 일찌감치 주목했지만 “야구만 하게 해달라”는 그를 외면했다. 야구보다는 사생활이 문제가 되고, 팀에 해악을 끼칠까 지레 겁먹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화 김인식 감독은 구단에 건의해 해설가였던 그에게 유니폼을 입혔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조성민이 오직 야구만 하겠다는데 다른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믿은 것이다. 김 감독의 용단 덕분에 한화는 훌륭한 투수를 얻었고, 막대한 마케팅 효과를 덤으로 누리고 있다.

조성민은 아내와의 이혼 이후 언론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렸었다. 이혼 문제를 두고 경쟁적으로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내는 언론에 대해 피해의식이 있었다. 때문에 언론과의 인터뷰를 피하기만 했다. ‘야구선수’ 조성민으로 돌아온 그는 웃음도 되찾았다. 조성민은 “야구에 대한 질문은 뭐든 좋다. 야구선수로서 내 실력이 모자라면 비판하는 기사를 써도 좋다”며 마음을 열어보였다.

아직 조성민이 이룬 것은 없다. 경제적으로 여전히 쪼들리고 있고, 앞으로 가정을 가질 자신감도 없다고 토로한다. 냉혹하게 말하면 그는 여전히 부상 경력이 있고, 나이도 적지 않은 연봉 5,000만원짜리 불펜투수다.

그러나 조성민의 얼굴에는 이미 행복감이 스며 들었다. “20년 동안 야구만 한 나를 야구선수로 봐 줬으면 좋겠다” “아이에게 아버지가 야구를 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던 바람이 실현됐기 때문이다.

조성민은 신일고ㆍ고려대 시절 임선동(현대 유니콘스)과 함께 초고교급 선수로 평가받았다. 당시에는 동기생 박찬호(샌디에이고 파드리스)도 이들의 라이벌 구도에 끼지 못했다. 특히 조성민은 연예인 뺨치는 외모까지 갖춰 일찌감치 스타덤에 올랐다. 요미우리에 진출했을 때 계약금 15억원을 받고 갔을 만큼 기량과 상품성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99년 일본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등 요미우리의 기둥투수로 성장했다.

이토록 화려한 경험만 했던 조성민의 꿈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저 ‘마운드에 서는 것’이었다. 그 소박한 꿈을 이루기 위해 세계 최초로 해설가에서 선수로 변신했고, 마침내 해냈다. 조성민이 “다음 목표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고 할 만큼 많은 사건들이 빠르게 진행됐다. 장면 하나하나가 극적이었다.

조성민이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사람들은 그를 동정했다. 화려했던 과거에 비해 그의 현실이 너무나 초라했기 때문이다.

그가 마운드로 돌아오자 그를 보는 시선은 달라졌다. 조성민이 살아온 질곡을 잘 알기에 그와 공감하고 그를 응원한다. 조성민의 야구인생에는 영화보다 많은 우연이 일어나고, 예기치 못한 반전이 거듭되고 있다.


김식기자


입력시간 : 2005-08-30 15:44


김식기자 seek@sportshankoo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