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프라이드 그랑프리대회 참관기

[스포츠] '사각의 지옥'에 열광하는 열도
일본 프라이드 그랑프리대회 참관기

지난달 28일 프라이드 그랑프리대회가 열린 일본 사이타마현의 슈퍼 아레나. 미들급 준결승ㆍ결승전과 함께 ‘격투기 황제’ 에밀리아넨코 효도르와 ‘무관의 제왕’ 미르코 크로캅의 세기의 대결을 보기 위해 몰려든 팬들로 경기장은 꽉 찼다.

“관중수 4만7,629명.” 매진 사례를 큰소리로 외친 장내 아나운서는 지난 대회 때와 정확히 똑 같은 수의 격투기 팬들이 경기장을 찾았다고 덧붙였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내는 숨소리만 합쳐도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한 어마어마한 관중 숫자. 기자는 이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약 4시간동안 쉬지 않고 질러댈 응원과 함성에 일찌감치 기가 질려 있었다.

현란한 레이저 쇼와 함께 무대의 막은 올랐고 지옥을 연상시키는 붉은 불기둥이 솟구치자 관중석은 환호과 흥분으로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장내 아나운서는 심장을 찢어놓을 듯 하면서도 귀에 척척 감기는 리드미컬한 목소리로 선수 소개를 했고 이내 경기장은 축제의 시작을 환호하는 관중들의 함성으로 떠나갈 듯 요란해졌다. 프라이드 주관사인 일본의 DSE는 이날 개막쇼에 약 50억원을 쏟아부었다고 밝혔다.

숨죽인 관중석의 비밀은

화려한 개막 행사가 끝나고 본 경기가 시작되자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그렇게 고대하던 경기가 저기 사각의 링 위에서 펼쳐지고 있건만 어쩐 일인지 경기장을 터질 듯 가득 메운 관중들은 들썩거리지 않았다.

마치 선수들이 가쁜 숨을 쉬는 링만 제외하고 경기장 전체를 ‘소리없음 모드’로 고정 시켜놓은 듯 조용했다. 약간의 과장을 섞자면 때마침 감기에 걸린 기자의 기침소리가 경기장을 쩌렁하게 울렸을 정도.

어쩌면 이리도 적막할 수 있을까. 기자의 궁금증이 풀리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본의 격투기 팬들의 경기 몰입 정도는 기자의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은 링 바닥에서 이뤄지는 선수들의 미세한 기술의 변화와 자리 싸움까지 숨죽이며 관전했다. 그들은 저 선수가 왜 저렇게 움직이고 있으며 다른 선수는 이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미리 예측하며 경기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눈깜짝할 새 전세가 뒤집어질 수도 있는 경기를 앞에 두고 어떻게 옆 사람과 얘기를 나눌 수 있단 말인가. 이날 경기장을 찾은 타다이시 마쓰이(27)씨는 “격투기는 야구와 달리 경기 진행이 빠르다.

이렇게 재미있는 경기가 눈앞에서 펼쳐지는데 다른 데 신경쓰면서 볼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프라이드는 서서 싸우는 입식 타격과 함께 누워서도 싸울 수 있는 종합격투기다. 그래서 혹자는 프라이드의 단점으로 그라운드 싸움의 지루함을 꼽는다.

선수들이 몇 분이고 링에 누워 대책 없이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심판이 적극적으로 그라운드 싸움의 시간을 제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이 ‘일리있는’ 지적에 일본팬들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마쓰이씨는 “격투기의 꽃이 무조건 KO만은 아니다”며 “링에 넘어져 서로 뒤엉켜 있는 선수들의 치열한 머리싸움을 보는 것도 격투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큰 묘미”라고 말했다. 그만큼 격투기 관전 수준이 높다는 은근한 자랑인 셈이다.

일본은 격투기의 천국

일본에서 격투기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격투기 선수들이 엄청난 스타 대접을 받고 이들의 얼굴을 딴 인형이나 관련 상품도 불티나게 팔린다.

특히 일본의 양대 격투기 단체인 K-1과 프라이드는 매년 12월31일 각각 도쿄돔과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최강자를 뽑는 결선대회를 갖는데 매해 매진사례다.

또한 100여종이 넘는 격투기 관련 잡지는 서점의 한 코너를 완전히 점령했고 스포츠 신문들은 매일매일 격투기 선수들의 근황을 소개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격투기 1세대로 불리는 스위스의 앤디 훅이 숨지자 일본에서 따로 장례식을 마련하고 수천명의 팬들이 참가해 죽음을 애도한 일화는 일본 열도가 얼마나 격투기에 열광하고 있는 지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준다.

기자는 프라이드 미들급 그랑프리대회를 통해 일본인들의 격투기 사랑을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대회 전날인 27일 도쿄 신주쿠의 센추리 하얏트 호텔 앞은 모여든 젊은이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출전 선수들의 계체식을 보기 위해 모인 팬들이었다. 요식 절차일 뿐인 계체식이 팬들을 위한 쇼가 된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선수들의 사진과 피켓을 들고 몇 시간의 기다림도 마다 않는 팬들의 열정은 호텔 지하 회의실에서 이뤄진 계체식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반더레이 실바, 마우리시오 쇼군, 이고르 보브찬친 등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일본 팬들은 이들이 한명씩 저울 위로 올라가 인사말을 할 때마다 요란한 괴성과 함께 디지털 카메라를 터트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열기는 대회 당일에 절정으로 치달았다. 사이타마현의 슈퍼 아레나 앞 광장은 팬들과 관련상품을 파는 상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효도르와 크로캅의 얼굴이나 팀 이름이 새겨진 티셔츠는 웃돈을 주고도 못 구할 정도였다.

경기장을 찾은 팬들은 너나없이 격투기 선수들 얼굴을 딴 인형, 볼펜, 열쇠고리 등을 들고 있었다. DSE의 사카키바라 사장은 “이번 대회 관련 머천다이징 상품이 6억원 정도 팔려나갔다”고 밝혔다.

물론 100만원에 육박하는 VIP석(10만엔), RRS석(링사이드석·3만엔), S석(1만7,000엔), A석(7,000엔) 등 입장 티켓은 대회 보름여를 앞두고 비싼 자리 순서대로 모두 팔려나간 뒤였다.

격투기는 쇼가 아니라 스포츠다

일본에서 격투기가 전국민적인 인기를 얻고 문화의 주요 아이콘으로 떠오른 배경은 뭘까.

우선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무를 숭상하는 사무라이 문화가 일본인들의 정신에 깊이 스며있다는 사실이다. 사카키바라 사장은 얼마 전 국내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인은 싸움 구경을 좋아한다”며 일본에서의 격투기 인기를 국민성에 연결시키기도 했다.

일본의 격투기 팬들은 승부보다는 과정을 중시한다. 전적이 좋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 경기를 하고 패배를 깨끗이 승복하는 선수들의 생명이 오래가는 이유다.

일본인들은 링 위에서 포효하는 선수들에게 나약한 자신을 투영시키며 폭력 본능과 무사도 정신의 대리 만족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에게 격투기 선수들은 현실로 튀어나온 무협지의 주인공 셈이다.

또 하나, 일본인들은 격투기를 단순한 쇼가 아닌 무림 고수를 가리는 진정한 스포츠로 간주한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인들이 격투기 선수들의 ‘마이크 어필’(경기 후 링 위에서의 멘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보다 확연해진다.

한때 격투기에서 이름을 떨쳤던 엔센 이노우에가 “링 위에서 사람을 죽여도 나는 상관하지 않을 것이며 그 어머니에게도 전혀 미안해 하지 않을 것이다”고 마이크 어필을 했던 적이 있다.

격투기를 레슬링 같은 쇼라고 생각했다면 웃고 넘어갈 일이었지만 일본인들은 이를 두고 “진정한 남자의 기상” “격투기에 대한 모독”이라는 팽팽한 격론을 펼쳐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바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본인들이 ‘넘어진 선수를 발로 가격하는’ 무자비하고 비신사적인 스포츠를 거리낌없이 즐기는 데는 TV와 DSE의 주도 면밀한 마케팅 전략의 힘이 지대하다.

시노다 소타로 프라이드 해외사업국 국장은 “프라임 시간대의 텔레비전 중계가 격투기의 확산에 큰 역할을 했다”며 격투기의 인기 원인을 분석했다.

그는 이어 “미국의 격투기인 UFC는 과격성 논란으로 텔레비전 중계 사정이 여의치 않아 UFC가 활성화되지 못했다”며 “일본에서는 프로 레슬링이 수십년 간 인기를 끌어왔고 이 자리에 격투기가 자연스럽게 파고들어가 과격성 논란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런 와중에 DSE는 최근 미국의 폭스스포츠 채널과 프라이드 방영 계약을 맺어 격투기의 위상을 세계적 스포츠로 높이는데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효도르의 얼음펀치와 크로캅의 하이킥에 전 세계인들이 열광할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


김일환기자


입력시간 : 2005-09-07 14:33


김일환기자 kevi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