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노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서 14년만에 메달 여자부 이상화도 역대 최고기록으로 5위

“강석아, 미안하다. 어려운 집안 형편을 생각해 스케이트를 포기하면 안 되겠니?”

이강석(21ㆍ한국체대)이 의정부중학교 3학년이던 1999년. 어머니 노정희(46) 씨는 머뭇거리다 아들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라가 외환 위기로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 금융을 지원 받던 때라 가세도 급격히 기울어 아들에게 충분히 경제적인 지원을 해줄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또래 친구들에 비해 유독 체격이 작았던 아들이 스케이트를 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안쓰러웠다.

하지만 어린 이강석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다. 집안 사정이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결코 스케이트를 포기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말을 꺼낸 걸 후회했다. “강석이가 저렇게 스케이트를 좋아하는데 괜한 말을 했어요. 그때는 살아간다는 게 너무 힘들어서 아들이 운동 대신 공부를 잘 해주기를 바랐지요. 체격이 작은 강석이가 대회에 나가면 마치 아이와 어른이 경주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발 우리 아들의 키가 170㎝까지만 크게 해달라고 기도했지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전해진 것이었을까. 이강석의 키는 177㎝까지 훌쩍 자랐고, 지난해 드디어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았다.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이강석은 14일 새벽(한국시간) 오발 링고토 빙상장에서 벌어진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1,2차 레이스 합계 70.43초의 기록으로 동메달을 따냈다.

스피드스케이팅에서 메달이 나온 것은 1992년 알베르빌 올림픽 남자 1,000m에서 김윤만이 은메달을 목에 건 이후 무려 14년 만이다. 금메달 못지 않게 값진 동메달이었다.

이강석은 1차 시기에서 미국의 킵 카펜터와 충돌할 뻔 했던 것이 못내 아쉬웠다. 100분의 2초만 빨랐더라면 은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기 때문. 금메달은 미국의 조이 칙(69.76초)이 차지했고, 은메달은 러시아의 드미트리 도로페예프(70.41초)의 몫이었다.

"살림 어려워 실내 빙상장도 못가"
이강석이 동메달을 따내는 순간 새벽까지 손에 땀을 쥐며 TV를 시청하던 아버지 이기훈(47) 씨와 어머니는 함께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 이씨는 “강석이가 초등학교 때 살림이 어려워 실내 빙상장에 보내줄 형편이 안 됐다”며 “의정부 논바닥에 물을 댄 뒤 얼음이 얼면 그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게 했다”고 힘들었던 과거를 회상했다.

어머니는 “강석이에게 ‘운동을 그만두라’고 말했을 때가 가장 마음 아팠다. 그때 남들처럼 넉넉하게 뒷바라지했더라면 아들이 좀 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을 텐데…”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스피드스케이팅에서 나온 14년 만의 메달은 토리노의 구두 수선공이 없었다면 볼 수 없을 뻔했다. 이강석은 1차 시기가 벌어지기 2시간 30분 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스케이트 끈을 조이던 중 ‘뚝’ 소리와 함께 끈을 묶는 구멍이 찢어졌기 때문. 순간 1년 전 같은 장소에서 열렸던 월드컵의 악몽이 떠올랐다. 당시 1차 시기에서 2위에 올랐던 이강석은 스케이트 구멍이 찢어지는 바람에 8위로 추락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김관규 감독은 찢어진 스케이트를 들고 구두 수리점을 수소문했다. 토리노 시내를 헤맨 끝에 간신히 수리점을 찾았지만 두꺼운 스케이트를 꿰맬 재봉틀이 없었다. 수선공의 도움으로 인근에 위치한 다른 수리점으로 달려갔지만 문이 잠겨 있었다.

김 감독은 포기하지 않고 주위 식당을 뒤진 끝에 수리공을 찾았다. 수리공이 스케이트의 찢어진 부분을 꿰매는 동안에 김 감독의 등에는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경기 시작 1시간 전 스케이트를 받은 이강석은 비로소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1차 시기에서 카펜터의 부정출발로 리듬이 깨졌다. 게다가 아웃코스에 뛴 이강석은 자신보다 교차지점에 늦게 도착한 카펜터와 충돌을 피하기 위해 속도를 줄여야 했다.

동메달에 그친 이강석은 “0.02초 차이로 아깝게 은메달을 놓쳤지만 동메달만으로도 내가 다시 태어난 기분이다”면서 “구두 수리공을 찾아가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강석은 노트북 바탕화면에 500m 세계신기록(34.30초) 보유자 가토 조지(일본)의 사진을 깔았다.

가토처럼 최고가 되고 싶어서다. 가토의 질주를 담은 동영상을 보면서 세계 최고를 꿈꾸던 이강석은 이번 대회 6위에 머문 가토(70초78)를 넘어섰다. 이강석은 4년 뒤 밴쿠버 올림픽에서는 한국 최초의 스피드스케이팅 금메달에 도전할 생각이다.

여자부 이상화, 자랑스런 레이스
그날 이강석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지만 다음날 여자 500m의 기대주 이상화(17ㆍ휘경여고)는 통한의 눈물을 쏟아냈다. 이상화는 15일 합계 77.04초의 기록으로 5위를 차지한 것이다.

이상화 선수.

동메달의 주인공 중국의 렌후이(76.87초)에 0.17초 뒤졌다. 1차 시기 첫 곡선주로에서 잠시 중심을 잃으면서 주춤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이상화는 94년 릴레함메르 올림픽 500m에서 5위를 차지한 유선희와 더불어 한국 여자 선수 가운데 역대 최고 성적을 거뒀다.

이상화는 메달을 따지 못했다는 것보다는 오빠 이상준(20) 씨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게 더 가슴 아팠다. 이상화는 오빠와 함께 초등학교 때부터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빠는 IMF 시절인 98년 “집안 사정이 어려운데 나 때문에 동생의 빙상여왕 꿈을 꺾게 할 수는 없다”며 운동으로 성공하려는 야망을 스스로 포기했다.

동생은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 “오빠를 위해서라도 꼭 메달을 따낼거야”라고 굳게 약속했고, 오빠는 “힘들 때는 나를 생각해 이겨내고 있는 힘을 다해 질주하라”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

“나를 위해 스케이트 선수의 꿈을 포기한 오빠를 위해서 꼭 메달을 따고 싶었는데….” 눈물을 펑펑 흘리던 이상화는 “1차 시기에서 넘어질 뻔해서 기록이 좋지 않았다”며 “2007년 중국 장춘 동계아시안게임에서는 기필코 금메달을 따겠다”고 입술을 깨물었다.

오빠 이씨는 “5위도 역대 한국 여자 선수 가운데 최고의 성적이 아니냐”며 “상화가 다음 올림픽에서는 빙상여왕의 꿈을 이룰 것이다”라고 동생을 위로했다.

이강석과 이상화의 빛나는 선전에 한국 스피드스케이팅계는 이제 오랜 침체에서 벗어날 때가 왔다고 들떠 있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한국 쇼트트랙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휩쓸자 빙상연맹은 그동안 쇼트트랙에 지원을 집중했다. 자연히 어린 꿈나무들은 스피드스케이팅을 기피할 수밖에 없었다.

역경과 설움을 딛고 우뚝 선 이강석과 이상화. 각각 21세와 17세. 그들의 ‘성장판’은 아직 닫히지 않았다. 그들이 4년 뒤 밴쿠버 올림픽에서 금메달 사냥에 나설 때 쯤이면 한국 스피드스케이팅도 화려한 꽃을 피우지 않을까.


이상준 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