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이창동 감독의 <시>과연 현실에서 시가 아름다울 수 있는지 묻는 영화

이창동 감독의 <시>에 관한 리뷰를 쓰기 전에, 개인적인 푸념을 늘어놓아야 할 것 같다. 정확한 이유를 댈 순 없지만, 나는 태생적으로 '시'에 공명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많은 이들이 '아름답다'고 극찬하는 시도, 시 자체를 읽고 그렇게 느껴본 적이 별로 없다. 오히려 시를 줄줄이 해석해 놓은 시평을 읽고서야, 그 시가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지 곁눈질하는 수준이다.

이창동 감독의 <시>를 본 후, '시'를 읽었을 때와 비슷한 상태에 놓였다. 주제는 어렴풋이 와 닿았지만, 즉각적인 반응이 튀어나오지 않는 약간은 답답한 심정.

지금까지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소설가'라는 그의 전직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음새가 견고하고 꼭 필요한 시점에서는 친절할 줄 아는 좋은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시>는 다르다. 접속사와 조사를 생략하고 함축적인 단어를 충돌시켜, 기대치 못했던 '상(像)'을 맺게 하는 '시'의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그래서 처음엔 무식하게도 '단순하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스쳐 듣기만 해도 오래도록 입에 맴돌고 뇌리에서 가지를 뻗는 '훌륭한 시'처럼 이창동 감독의 <시>는 시간이 흐를수록 스쳐 지났던 장면이 명징한 울림으로 남는다. 그 울림의 근원을 되짚어 보는 것은, 이창동 감독의 '시'이자 '영화'인 <시>에 사족 같은 시평에 그치고 말 것이다. 하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시'와 친하지 않은 관객은 이창동 감독의 <시>를 보기 전에, 다양한 시평을 먼저 읽는 것도 괜찮은 감상법일 듯하다.

<시>의 주인공은 서울 인근 소도시에 사는 60대의 노인 미자(윤정희)다. 그녀는 딸이 맡기고 떠난 중학생 손자 종욱(이다윗)과 단둘이 살고 있다. 낡았지만 두 식구 몸을 누일 작은 아파트도 있고, 국가보조금과 간병인 일로 생활비도 충당된다.

편안할 것도, 끔찍이 고통스러울 것도 없는 그저 그런 노년. 그러던 어느 날, 미자는 문화센터에서 '시 강좌'를 듣고 시를 배우기 시작한다. 듣고 보니 "시는 아름다운 것"이라는 데, 미자도 유독 "아름다운 것"에 관심이 많다.

나이에 비해 꽤 고운 얼굴인 미자는 하늘하늘 레이스가 달린 옷과 모자를 좋아하고, 말투 역시 '홍홍' 거리는 데가 있다. 60대 중반의 나이에도 병원 문진에서도 슬쩍 나이를 한 살 깎아 볼 만큼 여자다운 구석도 있다. 미자는 "시를 쓰려면 (주변을) 잘 봐야 한다"는 시인 선생님(김용택)의 말에 따라, 주변을 '보기' 시작한다.

꽃도 보고, 나무도 보고, 사과도 보고, 살구도 본다. 하지만 정작 봐야할 것은 잘 못 본다. 예를 들면, 그녀의 어린 손자가 저지른 범죄, 그 범죄의 희생자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소녀, 그 소녀의 어머니의 통곡 같은 것들 말이다. <시>는 미자가 '시인의 눈'을 갖기까지의 과정을 한 편의 시처럼 써내려간다. 때로는 편안한 일상의 언어로, 때로는 자연의 언어로, 때로는 벼락같은 직언으로.

이 노인은 왜 갑자기 시가 쓰고 싶어진 걸까. <시>의 첫 번째 질문이다. 이름마저 '아름다운 사람'인 '미자(美子)' 할머니는 문득 '아름다운 세상'이 그녀의 곁에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가 필요했던 것 같다.

직접 '시'를 쓸 수만 있다면, 그녀의 평안하지만 별 볼일 없는 노년도 아름다운 것으로 격상될 것 같은 마음에 미자는 악착같이 '시 쓰기'에 매달린다. 처음 시를 쓰기위해 애쓰는 미자의 모습은 우습다. 사과 한 알을 빤히 바라보다가 "사과는 역시 보는 것보다 먹어버리는 거야"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와삭 베어 무는 모습은 천진해서 귀엽다.

하지만 '아름다운 시'를 향한 미자의 애착이 반복되면서, 그녀의 시 쓰기는 그악스럽게 보일 지경이다. 가장 섬뜩한 장면은 미자가 한 여인을 만나 자작시 '살구'를 들려주며, 삶의 반복이 어쩌고 희생이 저쩌고 하며 기쁨에 들떠 시를 논할 때다.

관객들이 입을 떡 벌리고 미자의 퍼포먼스를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던 차에, 미자도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고 자리에 멈춰 선다. 미자가 삶이 아름답다고 장광설을 늘어놓은 여인은, 미자의 손자(를 비롯한 여러 남학생)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학생의 어머니다. 미자는 가해자의 보호자로서 (지금은 세상에 없는) 피해자의 어머니에게 합의를 부탁하러 만난 자리에서 '시의 아름다움'을 주워섬긴 것이다.

<시>의 본격적인 질문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과연 시는 아름다운가? 시가 "아름답다"고 배운 미자는 시를 쓰기 위해 '아름다움'을 찾아다니지만, 그녀가 자꾸 발견하게 되는 건 보고 듣기조차 힘든 '추함'이다. 미자가 처한 현실이 '추하다'는 표현은 거칠기 짝이 없지만, 극도의 추함이 반복되는 현실은 그 자체로 고통인 것만은 사실이다.

미자가 그 고통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즉 가식적인 아름다움에서 발을 빼는 순간, 그녀에게 시가 다가온다. <시>는 이것을 '시의 정의'로 못 박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시는 아름답지 않다. 아니, 고통 가득한 현실 속에서 탄생하는 진짜 시들은 아름다울 수 없고, 아름다워서도 안 된다. 시는 희열에 찬 감탄이 아니라 꺼억꺼억 쏟아지는 눈물이다.

미자는 이제 진짜 시를 쓰기 위해 필요한 건 감수성이 아니라 용기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미자는 고통스러운 현실과 대면하기 위한 짧은 여행을 떠난다. 그녀는 죽은 피해자의 장례식에 몰래 숨어들어가고, 소녀의 사진을 훔쳐 손자 앞에 들이밀고, 소녀가 뛰어내렸을 다리 위에 서본다. 그리고 스스로 소녀와 비슷한 고통을 체험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취한다.

이제 마지막 질문. 그러면 시는 반드시 써야 하는가? 이창동 감독은 역시 단호하게 답한다. 그렇다. 시가 나의 것이기도 하고, 너의 것이기도 한 고통스러운 현실과 대면하는 용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시'를 써야만 한다. <시>의 드라마틱하고도 고통스러운 엔딩은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다.

우리 주변 어디선가 반드시 벌어지고 있는 비극에 눈을 감아선 안 된다고 나직히, 그러나 묵직하게 말하는 영화의 엔딩은 불 켜진 극장문을 나선 뒤, 며칠 간 머릿속에서 웅웅거리며 맴돈다. 영화를 보고 난생 처음 '시'의 여운에 시달렸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시>를 통해 다른 차원의 문을 연 것 같다.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