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팍 도사'와 '라디오 스타'로 본 세대 간 가치변화

지난해 대중문화 최고의 화두는 단연 엠넷의 신인 스타 발굴 프로그램 <슈퍼스타 K>였다. 최고시청률 14%대를 기록하며 공중파 프로그램들을 무안하게 만들었고, 무명이었던 출연자들은 데뷔도 하기 전에 연예인 급 인기를 누렸다.

이 프로의 최종 우승자는 배관공 출신에 중졸 학력을 가진 허각으로, 그와 결승전에서 붙은 상대는 드라마틱하게도 유학파에 외모까지 훈훈한 존박이라는 남자였다. 키, 학력, 외모, 가정 형편, 모든 면에서 열세였던 허각이 존박을 꺾는 모습을 지켜본 시청자들은 '인간 승리', '루저들의 희망'이라는 찬사를 보내며 함께 기뻐했다.

그러나 프로그램 종료 후 뒷덜미에 뻑적지근하게 달라붙는 이 불편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배관공들에게 출세할 수 있다는 희망과 동시에 아침에 더 일찍 일어나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을, 루저들에게 너도 성공할 수 있다는 긍정적 메시지와 함께 '열심히만 하면'이라는 전제를 깔았을 때 느껴지는 피로함말이다.

그래서 허각처럼 되지 못할 경우 그것은 모두 네 탓이라는, 그 가혹한 논리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나는 어디까지 올라가야 하나요?

<주간한국> 신년특집의 주제는 '보통 사람 전성시대'였다. 기사에서 문화평론가 권경우 씨는 '보통 사람'인 허각이 남긴 성공신화의 위험성에 대해 이렇게 지적했다.

"허각이 1등이 된 후 청와대에 초청된 것을 보면 '봐라, 너희들도 열심히 하면 이렇게 출세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MB가 노숙자나 노점상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말하던 수법과 비슷하다. 30~40년 전에는 그럴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기회가 주어지는 시대가 아니다"

며칠 전 출간돼 베스트 셀러 반열에 오른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는 여기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엄기호 교수가 2년간 대학생들과 토론하고 강의한 내용을 묶은 이 책에서는 우리 사회를 공연한 죄책감에 빠뜨리는 온갖 성공신화들이 기성세대의 가치관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한다.

80년대는 '인간이 빛났던 위대한 시대'이자 '할 수 있다'의 시대였다. 이 시기를 살았던 386세대들은 자신이 속한 나라가 경제적으로 급속히 성장하는 것을 목격했고 헝그리 정신 하나로 타고난 환경과 사회적 위치를 전복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참는 법을 모르고 대의를 위해 자신의 이익을 반납할 생각이 전혀 없는 '요즘 것'들에게 불만이 많다. 그러나 엄기호 교수는 그 자체로 특권층이었던 당시의 대학생과 상위 5%를 제외하고는 잉여 인간 신세인 요즘의 대학생들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다.

대학생이 되기만 하면 끝났던 경쟁은 대학 입학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젊은이들은 학벌, 성적, 영어 점수뿐만 아니라 외모, 사회성, 인성, 다양한 경험까지 포함한, 완벽한 스펙을 마련하기 위해 고등학교 4학년의 시대를 맞이한다.

IMF 이후 2 대 8의 체제를 굳힌 사회에서 시간과 학벌, 외모는 돈으로 살 수 있게 됐으며, 8에 속한 이들은 잠깐만 한 눈을 팔아도 잉여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탓은 모두 본인에게로 돌아간다. '허각도 하는데 너는 왜' 라는 비난 앞에 죄인이 된다.

"나는 혹은 우리는 인생의 모범답안을 끊임 없이 목격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꿈이 있고 꿈을 좇는 에너지가 있고 그것만이 인생이라는 모범답안이 우리 스스로 가져야 할 인생의 이상을 대신 이야기해주고 있다."

책 속 인터뷰이 중 한 명인 25.5세 지은 양의 말에서는 더 이상 그들만의 가치를 따를 마음이 없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바뀐 세대의 가치관은 TV 속에서도 드러난다. 우습게도 <황금어장>이라는 한 프로그램 속에 나란히 붙어 있는 <무릎팍 도사>와 <라디오 스타>를 통해서다.

아저씨들 성공 얘기는 이제 그만

<무릎팍 도사>는 소위 성공한 일류들의 신화를 찬양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사회의 저명인사들과 한때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던 연예인들이 나와 역시 A급 연예인인 강호동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과거부터 지금까지 천천히 풀어 놓는다.

그들은 대부분 좋지 못한 환경에서 시작해 독기를 품는 계기를 맞이하게 되고, 새벽 4시에 일어나 새벽 2시에 잠드는 피나는 노력을 통해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뼈 빠지는 노력' 대목에서 강호동은 과장된 리액션과 함께 종종 눈물을 보인다. 이 부분을 빼먹는 출연자에게는 굳이 꼬치꼬치 캐묻기도 한다. 얼마나 고생했는지 빨리 말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력을 통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노력의 숭고함을 증명하라고 촉구한다.

<무릎팍 도사>가 끝나고 바로 시작되는 <라디오 스타>는 일류가 되지 못한 사람들이 서로를 비웃는 프로그램이다. 쓰디쓴 무명 시절을 겪었던 김구라는 한물간 연예인과 뜰 가능성이 희박한 신인들을 앞에 두고 위태로웠던 자신의 삶에 비추어 그들의 초조함, 비참함을 이끌어내고 즐거워한다.

한국 기성세대의 전형성에서 비껴나 있는 원년 초식남 윤종신 역시 특유의 감성과 재치로 루저들의 대화에 적절히 끼어 든다. 한 인간의 노력에 대한 가치 인정보다는 물어 뜯으며 웃기 바쁘다.

사실 <라디오 스타>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은 얼마 전 하차한 신정환인데, 그는 감동이나 눈물에는 아예 무관심하며 심지어 질색하기도 했다. 출연자가 자신이 겪은 역경이나 고난에 대해 이야기할라치면 재빠르게 초를 치며 희화화시키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대단한 신선함을 불러왔다.

프로그램은 교훈도 없었지만 동시에 부담감도 없었고, 가볍고 즐겁기만 했다. 이것은 TV의 역기능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적어도 시청자들에게 한 가지 삶의 방식을 종용하지는 않았다. 이는 시청률로도 증명됐다. 최고의 출연진을 엄선하는 <무릎팍 도사>와 섭외에는 한결 힘을 뺀 <라디오 스타>의 시청률 격차가 이제 얼마 나지 않게 된 것이다.

오히려 <라디오 스타> 마니아층이 생겨났는데, 그들은 제 돈 주고는 사 볼 일 없는 자서전 같은 <무릎팍 도사>를 외면하고 그저 그런 위치의 사람들이 즐겁게 낄낄대는 <라디오 스타>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일류들의 성공신화는 여전히 대중의 관심사이자 감동을 주는 콘텐츠지만, 이제는 자기 색깔이 분명한 이류들의 여유로운 인생도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연말 시상식에서 초미의 관심사가 된 것은 대상 수상자 외에도 '시상 소감'을 발표한 배우 박철민이었다. 그는 상 하나 타지 못했지만 웃는 얼굴로 나와 "시상할 수 있게 해주신 관계자 분들께 감사 드린다"고 운을 뗐다. 이어서 자신은 (이 시상을 하기까지) 한 역할이 없고 스탭들의 밥상에 숟가락만 올렸을 뿐이며,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해서 감독상, 작품상 '시상'하는 배우가 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시상이나 수상이나 트로피 주고 받는 건 비슷하다'는 그의 말에, 화려한 드레스 속에 긴장감이 빡빡하게 숨어 있던 시상식장의 분위기가 일순간에 풀어졌다. 노력, 발전, 성장, 눈물 등 적어도 한국에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던 절대적 가치에 금이 가고, 여유와 위트, 다양성이라는 새로운 가치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개인의 발전이라는 개념에 있어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발전의 방향, 속도, 시기, 규모는 개인이 스스로 결정할 일이다.

사회 트렌드를 관찰하는 한 연구원은 앞으로 모든 산업은 현대인의 불안을 이용한 '불안 장사'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성공에 대한 개인의 최종 좌표를 정하지 않고 무작정 달리기만 한다면, 또 사회적으로 다양한 삶의 형태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어렵게 번 돈을 평생 불안을 해소하는 데 소비해야 할지 모른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