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여성 성악가의 비극적 죽음으로[우리시대의 명반ㆍ명곡] 윤심덕 '사의 찬미' 1926년 Nitto 축음기한달 동안 12장 음반 발표… 유성기 전성시대 본격화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윤심덕의 '사의 찬미'가 발표된 1926년을 한국 대중음악의 원년으로 보는 시각은 강력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충격적인 정사 스캔들로 한국 대중음악의 생명력이 생성된 점이다. 식민지 조선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윤심덕과 그의 유부남 애인인 극작가 김우진의 동반자살은 대중음악에 대한 거대담론의 시작이었다.

루마니아의 작곡가 이바노비치의 관현악 월츠 '다뉴브 강의 잔물결'의 선율에 한국어 가사를 붙인 이 노래는 한국인에 의해 창작된 최초의 대중가요는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양식의 노래였고 무엇보다 대중적 파급력이 엄청났다.

'사의 찬미'는 후대의 무수한 대중가수들이 리메이크하지 않았다면 대중가요가 아닌 가곡으로 봐야 될 소지가 다분하다.

'사의 찬미'는 서양 클래식 작곡가의 멜로디에 윤성덕(윤심덕의 동생)의 피아노 반주로 부른 노래이기 때문이다. 또한 윤심덕은 경성 사범학교와 도쿄 우에노 음악학원에서 유학한 엘리트 여성으로 일본풍 유행창가나 민요가 아닌 가곡을 부르는 성악가였다.

31세 노처녀로 세상을 떠난 윤심덕은 김우진뿐 아니라 서울 갑부 이용문 등과 염문을 뿌렸던 당대의 자유연애주의자였다. 모던 걸 윤심덕의 갑작스런 죽음과 사후에 쏟아져 나온 그녀의 노래들은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며 뜨거운 화제가 되었다.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은 윤심덕과 김우진의 자살에는 온갖 의문이 난무한다. 두 사람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고 관부연락선 객실에서 발견된 김우진의 짤막한 유서만이 이들이 동반 자살했다는 유일한 단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일본에서 두 사람을 목격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목포의 부유한 지주의 후손인 김우진과는 달리 평양 출신의 윤심덕은 넉넉하지 못한 집안에서 성장해 총독부 관비 유학생 자격으로 유학을 갔다.

한국 최초의 음악 잡지라 할 수 있는 <일동 타임즈> 1926년 1월호는 매우 흥미롭다. 당시 음반을 취입하러 일본으로 떠나기 직전의 윤심덕과 피아노 반주를 한 여동생 윤성덕의 진귀한 사진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이는 윤심덕의 음반취입 사실이 발표 이전에 이미 일반에 널리 홍보되었다는 증거다. 윤심덕은 '사의 찬미'가 세상에 나오기 6개월 전 일본 니토 레코드를 통해 '매기의 추억', '반달', '방끗 웃는 월계?', '사랑의 클리민트', '어엽븐(어여쁜) 색씨'를, 1달 전에는 '너와 나', '아, 그것이 그 사랑인가'를 발표했던 주목받는 성악가였다.

경성에서 작성한 일본 니토 레코드와의 계약서에는 없던 '사의 찬미'가 사후에 일종의 유작 개념으로 발표되면서 폭풍의 눈이 되었다. 500장이 제작되었다고 전해지는 초반은 자살 사건 이후 품귀현상을 빚었다고 한다. 당시의 유성기 음반도 지금과 같은 싱글과 앨범 개념이 존재했던 사실은 흥미롭다.

처음 발매된 음반은 '사의 찬미' 한 곡만이 수록된 소위 '쪽판'이고 엄청난 반응 속에 재발매된 음반 뒷면에는 찬송가 '부활의 깃붐(기쁨)'이 추가되었다. 1926년 8월에 발매된 '사의 찬미'가 엄청난 신드롬을 일으키자 2달 뒤 생전에 녹음한 한국 최초의 캐럴송을 비롯해 실로 다양한 장르의 24곡이 동시다발로 쏟아져 나왔다.

한국 대중음악 역사를 통틀어 한 달 동안 12장의 음반을 발표했던 가수는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나오는 음반마다 화제를 뿌린 윤심덕 덕분에 이 땅에는 비로소 유성기 전성시대가 본격화되었다.

윤심덕이 작사한 '사의 찬미'는 비장한 노래 제목처럼 염세의 향내가 진동한다. 인스턴트식 사랑이 난무하는 요즘 세대는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곧 죽음'이었던 당대의 비장한 정서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조선의 엘리트 여성 성악가의 비극적 죽음을 통해 이 노래는 한국 대중음악사의 불후의 고전으로 자리매김되었다. 현재 10장도 남아 있지 않는 것으로 추정되는 윤심덕 '사의 찬미' 유성기 음반은 한국대중가요 최고가 음반으로 부르는 게 값인 귀한 존재가 되었다.



글=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