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 대립의 상징서 유머러스한 휴머니즘으로 중심 이동

MBC 창사 50주년 특별 다큐 <타임> '간첩'
'애타게 간첩을 찾아서'.

듣기에 따라서 정치적으로 오해를 받을 법한 제목일 수도 있다. 지난달 류승완 영화감독은 MBC 50주년 특별기획 다큐 '타임'에서 간첩을 '애타게' 찾아다녔다. 설정은 그가 차기작으로 첩보영화를 준비하던 중 영화의 모델이 될 수 있는 북한 공작원을 직접 찾아 나선다는 것. 거창하게도 '간첩 찾기 프로젝트'였다.

류 감독은 정부기관에 공식적으로 협조 요청까지 하고 나선다. 고위층 출신의 탈북자들, 80~90년대 방북 사건에 연관되어 간첩 혐의를 받았던 인물들, 대북 사업을 하는 인물들을 찾아가 간첩을 만나게 해달라고 사정하지만 명쾌한 답을 듣지 못한다.

서울에서 간첩을 찾는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꼭꼭 숨어있어도 모자랄 판에 얼굴을 들이밀며 '나 여기있소'라며 손을 들까 말이다. 과연 서울에 간첩이 있기는 한 걸까.

간첩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10대는 물론이고 20~30대 대중은 별 반응이 없을 듯싶다. 이데올로기를 떠나 현실적으로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KBS <스파이 명월>
간첩을 본 일도, 간첩으로 인한 국가적 손실을 맞닥뜨린 적도 없다. 그저 그 옛날 전쟁의 잔류로 말미암아 남아있는 비극일 뿐이다. 류 감독이 그토록 찾기를 희망하며 진행했던 '간첩 찾기 프로젝트'도 한낱 유머로서 받아들이게 된 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더 이상 간첩 혹은 스파이라는 단어가 심오하지도 이념적이지도 않다는 방증일지도.

그래서일까. KBS '스파이 명월'은 긴장감 있는 남북관계의 이념적 사상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엉뚱하면서도 발랄한 미션 수행에 무게를 뒀다.

남한에 주거하는 혹은 목적을 갖고 넘어온 간첩들이 등장하지만 일반적인 간첩 드라마는 아닌 것이다. '간첩 드라마'하면 떠오르던 군사 기밀이니, 테러니 하는 공작원들의 무시무시한 활동 내역이 아니라 오히려 멜로가 그 중심이다. '스파이 명월'의 황인혁 PD도 남북한의 이념적 문제보다는 사랑이야기를 봐달라고 했을 정도니 말이다.

남북문제를 배경으로 하고는 있지만 이념의 대립과 반목으로 얽힌 관계가 아닌 보통 사람들의 삶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것. 정치적인 색을 덜어냄은 기본이고 심각한 긴장감도 보이지 않는다.

한류 단속반인 북한 첩보원 한명월(한예슬 분)이 한류스타 강우(문정혁 분)와 결혼해 납치해오라는 임무를 맡으면서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이야기다. 다분히 코믹적인 요소가 눈에 띈다. 남한에 주둔하는 고정 스파이들의 등장이나 강우의 연기와 공연을 보면서 감탄을 연발하는 북측 고위간부의 대화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 간첩이라고는 하지만 나사 하나가 풀린 듯한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코믹하다.

영화 <간첩 리철진>
2009년 KBS '아이리스'와 비교되는 설정이다. '아이리스'는 철저하게 한국형 첩보드라마를 지향하며 한반도에서 벌어질지 모르는 2차 한국전쟁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이 카메라에 담겼다.

남북한의 첩보원들이 펼치는 리얼한 스토리와 액션은 첩보 세계의 긴장감과 현실감을 강도 높게 보여줬다.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분단국가의 현실을 TV로나마 접할 수 있었다. 코믹함과는 거리가 먼 긴장감이었다.

하지만 최근 간첩에 대한 대중문화적 경향은 긴장감보단 인간적 고뇌와 유머러스한 휴머니즘이다. 영화 <의형제>(2010)는 전직 국정원 요원과 남파공작원과의 이유 있는 동거로 인간적이면서 유머러스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코믹과 웃음으로 말이다. 간첩의 존재가 친근하고 만만해지는 순간이다.

이런 방식은 영화 '그녀를 모르면 간첩'(2002)이나 영화 '간첩 리철진'(1999)에서도 드러난다. 나름의 미션을 갖고 남파한 간첩이지만 어설프기 짝이 없다.

'그녀를 모르면 간첩'에서 림계순(김정화 분)은 거액의 공작금을 찾기 위해 비 오는 날 오리발 없이 임진강을 헤엄쳐 오는 캐릭터. '간첩 리철진'에서 리철진(유오성 분)은 남한에 오자마자 택시 4인조 강도에게 털리는가 하면, 북한의 식량난 해결을 위해 남한에서 개발된 슈퍼돼지 유전자 샘플을 입수해야 하는 인물이다. 어딘가 부족하고 순진한 캐릭터가 간첩의 이미지를 더욱 선량하게 포장한다.

영화 <국제 간첩>
과연 1960~70년대 간첩을 주제로 한 작품들도 그랬을까. 1965년 배우 남궁원, 이대엽 주연의 영화 '국제간첩'과 1979년 만화영화 '간첩 잡는 똘이장군' 등은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강한 작품들이다. '국제간첩'은 암살을 위해 밀파된 간첩, '간첩 잡는 똘이장군'은 반공 애니메이션이었다.

1950년 6·25 전쟁 이후 남북한의 관계는 적대적으로 흘러갔고, 1960년대 말에는 청와대 습격을 목표로 31명의 무장 게릴라가 남파한 1·12사건과 90여 명의 무장 게릴라가 경제혼란 등을 목표로 남하한 울진·삼척 간첩사건이 있다.

남북관계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 존재했고, 이 시기에 간첩을 보는 시선은 차갑고 무시무시했다. 21세기 간첩을 대하는 우리와는 사뭇 다른 이야기다. 시간적으로 간첩에 대한 잔상은 더 흐릿해지면서 그 의미와 역할에서부터 혼란이 오기 시작한다. 분단국가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망각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일각에선 그 잔상이 없어지기 전까지는 간첩에 대한 인상을 계속 심어주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젊은 세대들에게 분단국가의 현실을 고민하게 둬야 한다는 의미다. 코미디라고 그 고민이 지워진 건 아니니 말이다. 그래도 '스파이 명월'의 황인혁 PD는 간첩에 대한 스토리가 여간 부감됐던 게 아니었나 싶다.

그는 "소재 자체만으로 흥미를 끌 것 같아 고민을 많이 했다. 소재를 이용만 하는 게 아니라 결국 똑같은 남북의 젊은이가 고민을 나눈다는 전제 하에 개인사를 코미디로 풀어나가는 것"이라고 말했으니까.

영화 <그녀를 모르면 간첩>

영화 <간첩 잡는 똘이 장군>

강은영 기자 kis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