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시인 41주년] 폭로적 자기 분석으로 신화창조미발표 작품 담은 육필시고 전집 발표

오는 16일은 김수영이 타계한지 41주년이 되는 날이다. 불편하며, 비판적이고, 폭로적인 자아분석이 난무한 그의 시가 오늘날까지 사랑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문학에 그가 남긴 흔적은 무엇일까?

신화가 된 남자

시인 김수영(1921~1968)을 대체할 문인이 있을까. 시와 시론, 시평 등 왕성한 활동을 통해 우리 사회의 후진성과 허위의식을 비판했던 시인 김수영은 ‘그럼에도’ 진정한 참여를 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폭로했던 고매한 지식인이었다.

시대 의식과 시적 미학이 완벽을 이룬 그의 작품을 두고 문학평론가 김현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1930년대 이후 서정주ㆍ박목월 등에서 볼 수 있었던 재래적 서정의 틀과 김춘수 등에서 보이던 내면의식 추구의 경향에서 벗어나 시의 난삽성을 깊이 있게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던 공로자.’

1921년 서울에서 출생한 그는 1941년 도쿄상대에 입학했지만 학병 징집을 피해 귀국해 만주로 이주, 8ㆍ15광복과 함께 귀국해 시작(詩作) 활동을 했다. 한국전쟁 때 의용군으로 끌려나갔다가 탈출, 다시 경찰에 체포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생활하다 1952년 석방됐다. 그 후 교편생활, 잡지사·신문사 등을 전전하며 시작과 번역에 전념했다.

시인 김수영은 초기 모더니스트 시인으로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했다. 그러나 4ㆍ19혁명을 기점으로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한 참여시를 쓰며 작품 세계를 완성한다. 그는 1946년 ‘예술부락’에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한 뒤 1968년 마지막 시 ‘풀’에 이르기까지 200여 편의 시와 시론을 발표했다.

김수영 시에서 보이는 특징은 폭로적인 자기 분석이다. ‘죄와벌’(1963), ‘강가에서’(1964),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1965), ‘식모’(1966), ‘엔카운터지’(1966), ‘전화이야기’(1966), ‘도적’(1966), ‘성’(1968),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1968)등 전성기인 1960년대에 쓴 시들은 대체로 폭로적인 자기 분석에 근거하고 있다. 김수영의 이런 자기 분석은 직선적인 언어로 이루어지고 있다.

김수영에게 폭로와 자기분석은 타자와 세상의 허위를 비판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이는 정직과 양심, 자유와 저항 등 시대의 메시지로 확대됐다. 시인 신동엽은 김수영 사후, ‘지맥 속의 분수’라는 조사(弔辭)에서 “어두운 시대의 위대한 증인을 잃었다”고 표현했다.

그는 생전에는 비평적 조명을 받지 못하다가, 사후 지속적이고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는 점에서 하나의 신화가 된 존재다. ‘김수영 신화’는 1970~80년대의 시대적 특수 상황과 관련이 있다. 흔히 김수영의 시적 주제로 거론되는 ‘자유’, ‘정직’, ‘양심’, ‘사랑’ 등은 바로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시대적 화두였다. 문학평론가 김명인 씨는 “4.19는 김수영에게는 어떻게 보면 행운이라고 할까, 정말 절묘한 시대와 개인의 접합점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해 그의 타계 40주기를 기념하는 추모 학술제에서 문학평론가 백낙청 씨는 “참여를 하면서도 늘 자유분방하고 유머와 쾌활한 정신으로 넘치던 김수영 선생의 정신이 이제 우리사회 전반에 퍼져나갔다”고 오늘날 김수영의 의미를 말했다.

1-김수영 '겨울의 사랑' 육필 원고
2-김수영 육필시고 전집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김수영 시인의 부인 김현졍 여사(왼쪽)와 이영준 하버드대 한국학 연구소 연구원
3-김수영 육필시고 전집에 실린 '네이팜탄' 수정본. 발표된 지면에 시인이 직접 마침표를 삭제했다.

육필원고 시집 출간

김수영 타계 41주년을 앞두고 그의 미발표 육필원고가 일반에 공개됐다.

‘김수영 육필시고 전집’에는 김수영 전집에 수록된 시 177편의 영인본 이외에도 지난해 발굴된 시인의 원고와 메모, 김수영 시인의 부인 김현경(82) 여사가 정서한 원고 등 모두 354편의 육필 원고가 수록됐다.

김수영이 생전 유일한 시집 ‘달나라의 장난’(1959)을 출간하기 위해 손수 정리해 놓은 원고들과 각종 발표 지면을 스크랩해 그가 수정하거나 가필한 흔적들도 모두 담았다. 그 과정에서 기존에 확인되지 않았거나 잘못 알려진 부분도 찾아냈다.

가령 그의 첫 발표시 ‘묘정의 노래’는 그것이 처음 게재된 ‘예술부락’의 지면이 확인됐고, 발표 연도 또한 기존 1945년에서 1946년으로 정정했다.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 이영준 연구원은 “한국문학사에서 김수영에 대한 평가는 이념적ㆍ정치적 측면에 많이 치우쳐 작품 자체로 읽어내는 노력은 많이 부족하다”며 “주어진 텍스트를 철저하게 파악하고, 또 창작과정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 전집을 준비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은 시를 한 편 한 편 쓸 때마다 산고를 겪었다”며 “시인의 시 정신을 아직도 이렇게 생생하게 빛나게 해주는 분들이 계셔서 더없이 영광”이라고 감회를 밝혔다.

한편 김수영 시인의 사랑 시 한편도 새로 발굴됐다. 이영준 연구원은 ‘김수영 육필시고 전집’출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김현경 여사가 보관 중인 미발표시 ‘겨울의 사랑’의 원고를 발굴했다고 지난 1일 밝혔다.

가로 25㎝, 세로 14㎝ 크기인 거친 종이에 검은색 잉크로 쓴 ‘겨울의 사랑’은 주로 당대 정치현실에 맞서는 시를 쓴 김수영의 감성이 잘 드러난 보기 드문 사랑시로 평가된다.

‘늬가 준 요ㅅ보의 꽃잎사귀 우에서 / 잠을 자고 / 늬가 준 수건으로는 / 아침에 얼굴을 씻고 / 늬가 준 얼룩진 / 혁대로 나의 허리를 동이고 // 이만 하면 나는 너의 / 애정으로 목욕을 할수 / 있는 행복한 사람이다. // (중략) // 늬가 너의육체대신 / 준 요ㅅ보 / 늬기 너의 애무(愛撫) / 대신 준 흰 속옷 / 은 / 너무나 능숙한 겨울 / 의 사랑 / 여러분에게 미안할 정도로 / 교묘(巧妙)를 다한 / 따뜻한 사랑이였다 / 발악하는 사랑이였다.’ (시 ‘겨울의 사랑’ 중에서)

이 시는 김수영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만난 여인을 생각하며 1954~1955년 무렵 쓴 시로 추정된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고뇌하며 시대의 불운을 문학으로 토해냈던 김수영. 시인은 떠나도 시는 남았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