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작가] 이명랑·신이현·은미희 등 연애담 모은 에세이집 '설렘' 출간

문학이 인간의 삶을 언어 예술로 승화시킨 장르라면, 작가의 삶이야말로 우리 문학의 화수분일 터다. 작가들은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사랑을 했을까? 최근 작가들의 연애담을 모은 <설렘>이 출간됐다. 2007년 시인들의 연애담을 모은 에세이 <끌림>이후 두 번째 기획이다. 책에 속에 실린 작가들의 연애담을 소개한다.

나의 다크, 나이 에일레스, 나의 미스터 블랙

이명랑 작가의 첫사랑은 현실의 인물이 아니다. 황미나의 순정만화 <안녕, Mr. 블랙>의 주인공 미스터 블랙이 그녀의 첫사랑인데, 학창시절 그녀는 까만 쫄바지에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고 빨간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있는 미스터 블랙을 매일 연습장에 옮겨 그릴 정도로 자신의 사랑에 충실(?)했다.

다음 사랑에 빠진 상대는 신일숙의 만화 <사랑의 아테네>의 주인공 다크다. 큰 키의 명문 귀족에다 무뚝뚝한 그를 보며 이 작가는 ‘이런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여자가 되고 싶다. 이런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여자가 되고 싶다’(15쪽)고 생각했다. 이후로도 그녀가 사랑에 빠지는 인물은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주인공 에일레스 등등 순정만화의 주인공이었고, 미스터블랙과 다크와 에일레스를 합쳐놓은 남자를 절대로 만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결혼했다.

‘그러나 아무리 현실을 인정한 뒤였다고 해도, 남편은 너무나 현실적이었습니다.’(19쪽)

주말, 작가들과 떠난 여행에서 보낸 휴대폰 문자에 “왜 자꾸 이런 걸 보내느냐?”고 대꾸하고, 오랜만에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해보려고 할 때 싱크대에서 양파나 다듬고 있는 남편을 보면서 작가는 혼자 잠자리에 들어야했다.

‘그러니까 그땐 신혼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알지 못했던 거예요. 사랑에는 먹을거리를 챙기고, 야채를 다듬어 냉장고 속을 채워주는 그런 종류의 사랑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25쪽)

작가는 이제 자신이 늦게 들어온 밤이면 그저 밥은 먹었느냐는 말밖에 해주지 않는 남편, 그러나 아침이면 가스레인지 위에 자기가 잘 할 줄 아는 유일한 찌개인 된장찌개를 끓여놓고 출근하는 남편을 ‘나의 다크’, ‘나의 에일레스’, ‘나의 미스터 블랙’이라고 부른다.

“끝없이, 멈추지 말고, 언제나 당신의 왕자님을 꿈꾸세요. 그 환상이 언젠가 당신의 것이 되어 있을테니까요. 단, 중도에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파리의 연인

신이현 작가는 30대 초반, 파리 변두리 지역에서 있었던 기억을 꺼내 놓는다. 그녀는 학원비가 싸다는 이유로 등록한 어학원에서 중국, 브라질, 페루, 태국 사람들과 함께 수업을 듣게 됐다.

“달팽이 요리 좋아하세요?”

브라질에서 온 유학생은 그녀에게 프랑스 요리를 먹자고 데이트 신청을 했고, 둘은 근사하면서도 저렴한 식당을 찾아 헤맨다. 세 시간을 찾은 끝에 아담한 레스토랑에 들어간 그들은 달팽이 요리를 먹고, 어색한 프랑스어로 대화를 나누며, 프랑스 식으로 볼에 키스를 나누고 헤어진다.

그 후로도 그들은 한 두 달에 한번씩 비둘기 요리와 노르망디 굴, 알자스 와인을 마시며 ‘가난한 외국인 부부의 결혼기념일 식사’ 같은 데이트를 즐긴다. 물론 헤어질 때는 ‘프랑스식으로’ 서로의 양 볼에 입을 맞추면서.

브라질 정부 장학금으로 6개월 연수를 온 그는 고국으로 떠났고, 그녀는 남겨졌다. 그녀는 이후로 두어 번 더 비둘기 요리를 먹었고 자주 달팽이 요리를 먹었다. 그때마다 아마존이라는 글자 아래 새끼 악어가 프린트 된 티셔츠, 그가 떠오른다.

‘달팽이 요리를 먹을 때면 내 입술 쪽에 떨어졌던 쪽 하는 소리마저 들리는 듯하니 나는 참 바보다. 어떻게 하면 이 추억을 다시 받아올 수 있을까.’ (170쪽)

이런 사랑

은미희 작가의 첫사랑은 초등학교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교회장 오빠를 짝사랑했던 그녀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당신을 보고 있노라면 주변의 모든 풍경과 소음들은 사라져버리고 세상에는 오직 당신만이 존재하고 있는 듯했죠.’ (134쪽)

하지만 짝사랑 선배는 학창시절 친구의 연인이 됐고, 그녀는 남몰래 좋아하며 마음을 달랜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되고, 그녀는 짝사랑 선배와 연인이 된다. 그리고 연인이 되고서 여덟 남매의 장남이란 사실과 둘이나 되는 어머니, 이복형제까지 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그제야 그가 한 벌의 옷으로 일 년 사시사철을 견딘 이유를,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을 알게 된다.

‘당신은 사랑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지요. 그런 당신을 목도하고 나서야 사랑의 속성은 측은지심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143쪽)

선배는 자신에게 한마디 말없이 훌쩍 해병대에 자원입대했고, 그녀는 ‘하루아침에 내동댕이쳐진 심정’ 때문에 폐인으로 살았다.

‘한데 당신은 밤을 틈 타 또 다시 저에게 왔습니다. 처음 사랑을 고백하던 날처럼 당신은 밤에 나를 찾아왔지요. 한 명의 군인. 당신이었습니다. (중략) 당신은 무단으로 병영을 빠져나온 길이었지요.’(147쪽)

금융사고로 옥살이를 하게 된 어머니, 두 집 살림에 무능한 아버지. “다 죽이고 나도 죽겠다”던 선배는 격한 감정이 가시고 난 뒤 그녀를 풀어주었고, 다시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우연히 제주도에서 선배의 여동생을 만난 작가는 그가 서울 변두리 조그만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생의 굽이굽이에서 예기치 않게 당신을 만났듯 우리가 또 어떻게 어떤 자리에서 어떤 모습으로 마주칠지 모르겠습니다. 잊을 만하면 당신이 나타나고, 잊을 만하면 당신이 보였으니까요. 당신과 나, 인연이 그렇게도 질긴 모양입니다. 당신의 또다시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안녕, 하고 인사라도 건네 볼 참입니다.’(152쪽)

- 에세이집 <설렘>(랜덤하우스 펴냄) 참조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