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미의 우리풀 우리나무] 야고

초록이 없는 식물들.

초록이 없다는 사실은 엽록소가 없다는 것이고 엽록소가 없으면 양분을 만들 수 없으니 이러한 식물들은 당연히 기생식물들이다.

생각해 보면 기생식물들은 얄밉기 그지 없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것들을 취해, 스스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번성하고 있으니.

하긴 요즈음은 기생식물의 대우가 다르기도 하다. 참나무와 같은 나무에 달라붙어 나무의 질을 망치던 겨우살이는 항암작용이 있다는 소문이 돌아 파동이 날 정도이니 그동안 꾹꾹 참고 있던 참나무들은 이제야 안도의 숨을 쉴 정도이다.

바닷가 모래땅에서 초종용에 양분을 내어 주는 사철쑥도 억울하기는 마찬가지일 터이다. 희생을 하는 자신은 알아주는 이 하나 없고, 자신에게 빌붙어 사는 초종용은 희귀식물이니 연구 대상이니 하여 관심이 모아지고 있으니 말이다.

제주도 억새밭에도 이런 기생식물이 하나 살고 있다. 가을이면 제주도 억새밭은 여행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지천으로 피어 장관을 이루고 있는데 이 억새밭 사이에서 간혹 만날 수 있는 기생식물이 바로 야고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참 간사하여 심정적으로는 억새의 억울함에 마음이 가면서도 억새밭 사이에 숨어 있는 야고의 무리를 만나면 그렇게 반갑고 귀하고 예쁠 수가 없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흔하지 않은, 귀한 존재이고 볼 일이다.

야고는 열당과에 속하는 한해살이 풀이다. 기주 식물은 당연히 억새이다. 벼과식물이 기주라고 기록되어 있는 문헌도 있는데 우리나라에선 아직 그 이외에 기생하는 사례를 보지 못했다. 또 그 자생지가 우리나라에선 제주도만이 기록되어 있고 연접하는 동남부지역에 두루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줄기가 아주 짧아 땅위로 잘 드러나지 않으므로 거의 보이지 않다가 9월이 되어 꽃이 피면 볼 수 있다. 제주도 사람들이 대개 야고를 만나는 것은 추석 때 벌초하기 위해 산에 가서 억새를 베다가 그 밑에 숨어 있는 야고를 만난다고 한다.

꽃이 피면 한 뼘 남짓 줄기가 올라오고 그 끝에 분홍색의 독특한 꽃이 하나씩 달린다. 꽃은 원통모양인데 길이가 손가락 두 마디쯤 된다. 꽃잎 끝은 5갈래로 약간 벌어져 나불거리고 그 속에서 수술과 암술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수분이 되면 둥근 열매가 달리고 익으면 벌어지며 그 속에는 작은 씨앗들이 가득 들어 있다. 꽃잎 아래 큼직한 꽃받침도 인상적이다. 잎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을 찾기 어려운데 뿌리 근처에 갈색의 비늘잎 조각 같은 것이 몇 장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특별한 쓰임새가 기록되어 있지만 한방에서는 가을에 전초를 채취하여 생으로 혹은 말려 약으로 쓴다. 생약이름도 야고(野菰)이다.

청혈해독작용이 있어 인후통, 요로감염, 골수염 등에 몇 가지 증상에 처방한다고 알려져 있다. 꽃으로 보기에는 관상적인 가치가 있어 보이지만 키우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므로 아예 포기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야고를 보면, '기생'이란 말을 절감한다. 일상에서 보기 어려운 특별한 아름다움에 혹하여 캐어서 가까이 두려 해도, 결국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그 명을 다하는 것을 보면, 어쩌면 세상사와 이리도 똑같나 싶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99@fo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