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서고] 존 스타인벡의 <통조림공장 골목>각자의 궤도 공전하며 어울려 살아가는 곳 2층서 내려다 보는 느낌

작가라는 꼬리표를 달기 전까지 문학의 세계에서 나는 늘 오만한 독자였다.

경멸당할 이유가 없는 책들도 나를 덜 압도한다는 미명 하에 깡그리 무시하는 것이 내가 숭배하는 작가들에 대한 충성이라도 되는 양, 철없이 굴었던 순간도 있다.

종이 노동의 날들이 이어지면서 별수 없이 겸손해졌지만―그래도 열렬한 숭배의 감정은 누그러지지 않는다.

세상엔 좋은 작품이 너무 많다. 그 중에서도 팬이 되고 싶은 작품, 작가는 또 따로 존재하기 마련이다. 오늘 소개할 스타인벡은 내게 그런 작가다.

고등학교 때 읽은 <분노의 포도>의 강렬함 때문에 나는 그가 차갑고 냉철한 사실주의 작가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재작년에 나온 이 책을 접하면서 그 생각이 일면에 지나지 않은 것임을 깨닫게 됐다.

<통조림공장 골목>은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이 표현은 쓰는 즉시 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따뜻하고 행복하지만 인물들이 통과하는 세계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힘은 생생하다는 것이다. 책장을 펼치면 아주 자연스럽게 인물들이 어슬렁거리고, 사고를 치고, 한숨을 쉬고, 책이 끝나고도 이어질 다음 날로 걸어간다. 읽다 보면 통조림 공장이 있는 이 거리를 2층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

풍경을 좀 더 들여다 보자. 우선 중국인 리청의 가게가 보인다. 작지만 기적적인 구색을 갖추고 있는 이 식료품점은 돈을 받고 물건을 내 주는 방식의 거래만 취급하지 않는다. 지불하지 않고도 물건을 가져갈 수 있고 때로는 개구리까지 화폐로 받아준다. 단순한 외상이라기보다 신용을 바탕으로 한 관대하고도 복잡한 거래들이 이뤄지는데, 그 끝에 이 소설에서 가장 큰 소동이 벌어진다.

그 앞으로는 닥의 생물학연구소가 눈에 들어온다. 각종 생물을 채집해 필요한 연구기관에 보내는 곳으로 항상 음악이 들려오는 문화의 중심이다. 맞은편에는 한때 창고였다가 '팰리스 플롭하우스 앤드 그릴'이라 불리는 멋진 곳으로 탈바꿈한 맥 패거리의 집이 있다. 좀 더 떨어진 곳에는 도라 플러드 여사가 운영하는 깨끗하고 구식인 매음굴이 있다.

아, 빼놓기에 섭섭한 보일러통도 있다. 버려진 커다란 보일러 안에는 샘 맬로이 부부가 다른 통에 세를 주기도 하며 지내고 있다. 각자의 궤도에서 공전하는 이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곳이 캐너리 로(Cannery Row), 통조림공장 골목인 것이다.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역시 맥이다. 맥과 그의 친구들은 얼핏 보면 무위도식하는 건달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이런 부류의 인물을 문학은 전부터 사랑해 왔다.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책에 빚지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바닥 사람들 말이다. 그런데 맥이 그렇게 멋지지는 않다. 요령이 좋고 맘먹으면 못해낼 일이 없는 사람이지만 반쯤은 사기꾼 같고 일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민폐형 인간이기도 하다. 가장 큰 피해자인 닥의 말을 들어보자.

"저 친구들을 보게. 진짜 철학자들이야. 맥 패거리는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일과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을 아는 것 같아(……) 이른바 성공한 사람들은 다 병자야. 속이 안 좋고 영혼이 안 좋아. 하지만 맥 패거리는 건강하고 또 묘하게 깨끗해. 저 친구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걸 할 수 있어. 자기들 욕구에 굳이 다른 이름을 붙이지 않고 마음대로 충족시키지."

좀 배웠다는 닥과 상점을 가진 리청을 제외하면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개 가난과 무학의 인생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게 늘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

맥이 닥에게 잘 해주려다 망친 파티와 그 파티를 만회하기 위해 다시 연 멋진 파티에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다. 우리는 전부터 그들을 알고 있고, 혹은 비슷한 사람을 알고 있기에 함께 파티에 어울려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끝내주는 파티가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김성중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