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각의 세계화' 선언16년만에 대대적 새단장토종 대표 셰프·식재료로 승부

(좌) 나인스 게이트 실내에서 통유리를 통해 내다 보이는 환구단 전경. (우) 이민 셰프

국내에서 ‘당대’ 최고의 레스토랑이라면 단연 피에르 가니에르. 지난 해 말 서울 롯데호텔 최고층(35층)에 들어선 이 곳은 미슐랭 3스타(★★★)급 레스토랑이라는 타이틀로 최고급, 최고가, 최고 품격, 그리고 최고 미각을 보여준다 해도 크게 틀리진 않다. 당연히 롯데 그룹 이야기다.

그럼 바로 옆에 있는 웨스틴조선호텔은? 그래서 비슷한 시기에 소문이 떠돌았다. 역시 스타 셰프인 장 조지와 다니엘 블러드 등의 레스토랑도 한국에 들어온다는…. 물론 호텔과 외식, 백화점과 마트, 유통에서 최대 라이벌인 ‘롯데가 한다니’ 가만히 앉아 있을 수 만은 없는 모기업 신세계의 입장이다.

그리고 피에르 가니에르는 서울에 입성했다. 하지만 풍문으로만 언급되던 장 조지 등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만약 들어왔다면 제1 후보지였을 그 곳, 나인스 게이트는 대신 ‘독립’을 선택했다. 지금 나인스 게이트에 눈길이 가게끔 만드는 가장 큰 이유다.

이 후 몇 개월 간의 공사, ‘뚝딱, 쾅…쾅…’. 최근 나인스 게이트는 리노베이션을 마치고 새단장한 모습으로 문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손 본’ 시점이 1993년이니 무려 16년 만의 ‘대대적 손질’이다.

더불어 나인스 게이트 키친의 총책임자로 임명된 이는 이민 셰프. 웨스틴 조선은 그에게 음식과 메뉴에 대한 모든 권한과 책임을 맡겼다. 그리고 새롭게 내건 타이틀은 ‘한국 미각의 세계화’ 선언.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프렌치 레스토랑이지만 ‘우리 나름의 한국적인 토종 브랜드를 만들어 보자’는 신념에서다.

그래서 이민 셰프는 먼저 피에르 가니에르에도 (벤치 마킹차) 가봤다. “여긴 웬 일로 오셨어요?” 손님으로 갔기 때문에 당연히 연락을 하고 간 것은 아니지만 같은 업종의 호텔 셰프끼리는 어차피 구면 사이. 인사를 건네는 ‘라이벌 동업자’에게 “한 수 배우러 왔습니다”라고 그는 웃으며 말했다.

(위) 절인 배추볶음과 겨자씨 소스의 마늘을 입혀 구운 통양갈비
(아래)매생이 덤플링과 토마토 다시아 육수의 황도미 구이

필연적인 경쟁(?) 관계인 롯데호텔에 맞서 이민 셰프가 선택한 길은 한국적 식재료의 발굴, 그리고 토종 식재료의 프렌치 요리 접목이다. 스타일과 테크닉에서는 프렌치를 기반으로 하고 푸드 스타일이나 서빙 등도 ‘프렌치 수준’이지만 식재료 만큼은 토종을 접목시키겠다는 것이다. 굳이 우리식대로라는 것을 먼저 내세우려는 의도라기 보다는 모든 음식은 ‘현지의 제철’ 재료가 최고의 맛을 낸다는 확신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프렌치 메뉴에는 우리네 식탁에 오르는 음식들이 무척 많이 오른다. 백김치를 비롯해 흑마늘과 꼬막, 톳, 두릅과 흑돼지까지. 이들 식재료는 때론 음식의 조연으로, 또 때론 주연으로 그릇에 담긴다. 물론 프렌치 퀴진 혹은 모던 유러피안 메뉴로서의 자격이다.

톳 샐러드, 절인 배추볶음과 겨자씨 소스의 마늘을 입혀 구운 통양갈비, 매생이 덤플링과 토마토 다시아 육수의 황도미 구이 등이 그가 내놓은 대표적인 메뉴들. 오미자로 만든 젤리, 푸아그라와 함께 하는 단 감 조림 등도 새롭게 개발한 토종 프렌치 디저트류다. 보통 서양식에서 감은 거의 쓰지 않는 과일인데 그는 일반적인 사과 대신 우리의 감을 발탁했다.

벌써 반응도 좋은 편이다. 정통적인 프렌치에 익숙한 것만을 고집하지 않는 젊은 세대의 입맛에 특히 어필한다는 평. 아무래도 패션 뿐 아니라 ‘맛의 파격’ 또한 젊은이들의 몫인 듯.

공고에서 기계를 전공한 이민 셰프는 국내 특급호텔에서 조리사 출신으로 임원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3인 중 한 명이다. 신라호텔의 후덕죽, 힐튼호텔의 박효남, 그리고 그. 엄밀히는 신세계그룹의 상무이다.

나인스 게이트 조리보조로 시작, 각종 국내외 요리대회에서 수상하면서 실력을 입증한 그는 얼마전까지 호텔의 상품개발연구소장을 맡았다. 호텔에서 외부에 운영하는 30여개 레스토랑의 식음 메뉴 개발 업무가 그의 업무. 전에는 오킴스와 예스터데이 등 레스토랑의 셰프로도 일했다.

해외 유명 주방장의 레스토랑 도입을 검토하던 웨스틴이 그를 최종 선택한 데는 여러 요인들이 고려됐다. 그동안 나인스 게이트의 셰프 자리는 거의 외국인 주방장의 몫. 하지만 한국 최초의 프렌치 레스토랑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 이 곳에서도 “이제는 한국인 대표 셰프의 이름을 걸고 새로운 서양식 요리를 선보일 때가 됐다”는 판단도 크게 작용했다. 비싼 로열티를 주고 ‘모셔와야만 하는’ 부담이 없는 것도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피에르 가니에르하고 비교가 되겠습니까! 전세계적으로 워낙 유명한데… 대신 저는 부담이 없습니다.” 겸손하게 말 하지만 그래도 그의 표정에는 책임감 못지 않게 자신감과 각오가 배어난다. “계속 외부에 의존만 할 수는 없잖아요!”

1924년 전신인 조선호텔이 4층 건물일 시절 ‘팜코트’로 문을 연 나인스 게이트는 1970년 지금의 이름과 분위기로 다시 태어나 무려 85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100년 가까운 전통을 지닌 한 마디로 국내 최고(最古)의 프렌치 레스토랑. 이번 레노베이션을 거치면서도 전면의 통유리 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환구단의 전경과 잘 꾸며진 정원 등을 내다보며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여전한 자랑거리다.

메뉴 : 스타터로 불리는 애피타이저류 1만6,000~2만9,000원, 메인 요리격인 세컨드류는 4만~5만원. 참숯을 이용한 스테이크 피시 등 그릴 요리를 강화한 것도 이전과 차이점. (02)317-0366



글ㆍ사진 박원식기자 park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