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여행] 부여 궁남지연꽃밭, 버드나무 숲, 서동요 실화 따라 천 년 전으로 시간여행

궁남지
흐드러진 연꽃 풍경을 찾아, 서동의 전설을 좇아, 무더위가 기승을 떨던 한낮에 닿은 부여 .

마래방죽이란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웠던 는 이른 더위 탓인지 고즈녁함 속에 사비성의 옛 전설과 향그런 연향(蓮香)을 후루루 풀어내고 있었다.

사적 제135호로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소재한 백제 사비시대의 궁원지로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인공 연못이며, 이맘때면 황홀한 연꽃들의 향연이 절정을 이루고, 를 휘감을 듯 하늘거리는 버드나무 숲이 장관이다.

그러나 가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는 것은 연꽃 밭의 아름다운 전경만이 아니다. 바로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향가 서동요의 발생지로, 백제 사비성 사람 서동과 적국인 신라의 선화공주와의 달큰한 사랑 이야기 속에 무왕의 백제부흥의 꿈이 서려있는 역사적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는 비록 규모는 예전과 비할 수 없이 축소되었다지만 여전히 드넓고 아름다운 연꽃 밭과 고목의 버드나무 숲이 현존하고 있는, 서동요의 전설이 역사가 되고 현실이 된 '백제의 정원'이다. 를 찾아 든 사람은 연꽃 밭과 버드나무 숲과 설화 속의 연못 정경에 심취하며 천년 전 백제 사비성의 시간 속으로 성큼 들어서게 하는, 초하의 정취와 감흥에 마음껏 젖어 볼 수 있다.

궁남지 연꽃
사부작사부작 지천으로 핀 연꽃 사이를 가르마진 조붓한 길을 따라 걷노라니 고운 꽃물로 한껏 치장한 연꽃들의 수런거림 속에 여린 연향이 바람결에 실려 가슴으로 살포시 스며들었다. 의 초입부터 눈은 연꽃에 설레고 마음은 연향에 취하니 내딛는 걸음은 자꾸 더뎌지고 멈춰진다.

혹자는 이슬을 머금은 꽃 봉우리의 함초롬하고 고아한 자태가 새벽 연 밭의 진경이라지만 꽃의 아름다움을 담는 마음이야 각자의 취향이며 속설에 무심할 수 있음이 연꽃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는 것은 아닐까. 유월 중천의 햇살도 아랑곳 없이 주돈이(중국 송의 유학자, 1017~1073)의 싯구를 읊어가며 휘적휘적 걸음을 옮긴다.

"나는 유독, 진흙에서 나왔으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고 출렁이는 물에 씻겨 깨끗하나 요염하지 않고, 속은 비어 있어서 통하고 밖은 곧으며, 덩굴도 뻗지 않고 가지를 치지 아니하며,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고, 꼿꼿하고 깨끗이 서 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나 함부로 가지고 놀 수 없는 연꽃을 사랑한다."

연꽃 중에 으뜸이라는 백련, 의 주인이라는 홍련이 두렁을 경계 삼아 서로의 화사한 꽃빛을 뽐낸다. 그리곤 찾아오는 이를 반기듯 저마다 솟아올린 꽃대를 한들거리는데, 이에 질세라 성급히 꽃 한가운데에 씨방을 짓고 다음 세상을 그리며 영글어가는 연실 또한 노란 꽃술도 떨어내지 않고 하늘을 향해 대공을 세운 채 풋내 지우기에 한창이다.

그러나 연 밭을 뒤덮은 연잎만은 도드라짐을 거부하며 햇살에도 바람에도 미동조차 없다. 연 밭의 모든 꽃과 잎, 그리고 씨앗마저도 저마다 곧은 하나의 줄기를 세우고 기품 있는 자태로 제 생을 꼿꼿이 지탱하고 있다.

궁남지 포룡정
쨍쨍한 햇살 아래서 연 밭을 매는 아낙들의 분주한 손놀림이 연꽃에 닿고 그들의 땀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연 밭에선 쉼 없이 연향이 날린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시집가 놓고 서동 서방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네."

어디선가 나직이 들려오는 서동의 '사랑가'에 미소가 지어지고 만개한 연꽃 사이를 누비며 연향에 취하는 모두가 시나브로 연꽃이 되고, 서동이 되고, 선화공주가 되는 한낮 의 그윽한 전경이 눈부시다.

연 밭두렁을 누비느라 녹진해진 걸음으로 의 중심인 포룡정을 향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 3만평이었다가 현재는 1만평으로 축소되었다는 의 포룡정이 한 손에 잡힐 듯 빤히 보이고, 하얀 물줄기를 뿜어 올리는 분수가 상쾌함을 더하는 의 본류, 대지가 더위와 따가운 햇살에 구시렁대던 여행자를 위로하듯 탁 트인 시야 사이로 그림 같은 풍경을 펼치며 마음까지 청량하고 시원하게 한다.

사위를 둘러친 버드나무 군락을 지나 한가운데에 동그마니 떠 있는 연못 속 섬 같은 포룡정으로 가기 위해 포룡교 앞에 섰다. 물 위에 걸어놓은 아름다운 나무다리인 포룡교가 물 아래에 제 그림자로 다리 하나를 더 놓았다.

궁남지 버드나무 숲
포룡정으로 들어서자 설파에 열중인 문화해설사의 입을 빌어 용신의 아들 서동이 입장하고 서동요를 노래하며 무왕의 사랑과 패망국 사비성의 눈물이 풀어지며, 찬란한 문화를 꽃 피웠던 백제의 흥망성쇠가 바람결을 따라 밀려오고 물결에 실려가며 저 멀고 먼 시간 속을 넘나든다 .

"연 꽃씨는 천년 후에도 꽃을 피운다고 합니다. 부여 곳곳에서 백제의 찬란했던 문화 유적을 찾는 발굴이 이어지고 있으니 자주 부여를 방문해 주세요."

연신 땀을 훔쳐가며 열변을 토하던 문화해설사의 맺음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관람객들은 우루루 포룡정을 떠나고, 그제서야 인기척이 사라진 호젓함 속에 느긋한 시선으로 정자 밖 풍경을 좇는다.

의 일반적인 관람 일정은 입구에서 오른쪽 연 꽃밭으로 들어서 가운데 자리한 포룡정을 거쳐 왼편 버드나무 산책로 따라 옥정과 황포돛배가 있는 입구로 되나가는 것이지만, 연못 전체가 평지라 느릇한 걸음새로 눈길 닿는 곳, 마음 이우는 곳들을 들며나며 자유롭게 산책을 즐겨도 부담이 없다.

포룡정의 고요한 물결에 더위와 시름을 털어낸 가뿐해진 마음을 주섬주섬 보담아 버드나무 그늘이 이어지는 산책로로 걸음을 뗐다. 는 연꽃만큼이나 버드나무가 많아 부드럽게 너울거리는 버드나무 가지의 흔들림은 독특한 정취를 자아내고 내딛는 걸음에 흥을 돋우는 경쾌한 추임새가 된다.

궁남지 포룡교
저만치 를 벗어나는 입구가 보이고, 그 곁에 물살을 가르고 나가야 할 황포돛배가 백제의 전설이 일렁이는 연못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저 황포돛배도 어느 즈음인가 에 20리길 물길이 다시 열리는 그날이 오면 1000년 전 백제의 유월의 그날처럼 서동과 선화공주를 태우고 연못을 누비리라.

이른 더위를 야속해하며 들어섰던 는 넓디넓은, 텁텁한 진흙 속 연 밭에서 고운 빛깔과 말갛고 정갈한 향기를 내며 피고 지는 연꽃들을 펼쳐 놓고, 유유한 시간을 역류해 만개한 연꽃 같은 세상, 백제의 찬란한 영광을 꿈꾸던 서동요의 전설, 무왕의 역사 속으로 속절 없이 이끌더니, 어느새 버드나무 그림자를 길게 늘어지게 하며 지워지는 햇살 아래 서서히 고요 속으로 침잠해 가고 있다 .

내년 6월 다시 오마, 약속 줄을 걸며 돌아보니 하나 둘, 떠나는 이들의 빈 자리를 더욱 진해진 연향이 스물스물 를 채우고 있다.



글•사진 = 양지혜 여행작가 himei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