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례 감독의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보고 눈물을 펑펑 쏟았던 기억이 난다. 평생을 삼류가수로 떠돌며 술꾼들의 흥을 돋우는 소모적인 음악인생을 살아온 남자 주인공이 비록 지방의 밤무대였지만 처음으로 자신의 창작곡을, 여고시절 타고난 노래실력으로 남학생들의 마음을 달뜨게 했지만 꿈을 잃고 평범한 야채장수로 살아가던 여자 주인공이 다시 노래를 부르며 감격해 하는 엔딩 장면은 뭉클한 감동을 안겼다.

무려 15년 동안 록밴드 <레이니선>의 리드보컬로 활동해 온 정차식은 지난해 8월, 솔로 1집 <황망한 사내>를 발표해 '2011년의 문제작'이라는 극찬을 이끌어냈다. 불과 5개월 만에 연속 발표한 2집 <격동하는 현재사> 또한 평단의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오랜 기간 밴드음악을 해온 그 역시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창작곡들로 꾸며진 솔로 음반의 의미는 각별했을 것이다. 기대 없이 세상에 던진 앨범이 예상치 못한 호평까지 이끌어내고 있으니 밴드시절과는 다른 질감의 감동을 그는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뮤지션에게 자신의 음악으로 대중과 소통할 수 있음은 돈과 명예보다 값진 존재의미를 지닌다. 정차식은 솔로 앨범에서 작사, 작곡, 노래, 편곡, 녹음, 믹스, 연주, 컴퓨터 프로그래밍 등 거의 모든 음악작업을 홀로 완성했다. 경이로운 점은 생활 소음까지 들리는 열악한 제작환경과 내밀한 자신의 이야기를 즉흥적으로 표출한 날 것 그대로 진행한 결과물이건만 진한 감동을 안겨주는 완성도를 구현하고 있음이다. 불가사의한 이 모든 것들에 대한 해답은 자신의 음악에 진심을 담은 진정성과 열정 이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비록 무관에 그친 아쉬움이 있지만 정차식의 정규 1집 <황망한 사내>는 2012년 제9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록 2개 부문 후보에 올랐고 네이버선정 '2011 베스트앨범' 5위, 다음뮤직 '2011 연말결산 국내 앨범' 2위 등 각종 매체에서 최고의 앨범으로 선정되었다. 정차식의 노래는 무릇 사내의 노래는 이런 것이라고 웅변하는 느낌이 든다. 퇴폐와 절망, 황량하고 우울한 분위기로 가득한 그의 음악은 그동안 저지른 자신의 잘못을 용서받고 싶은 남자의 진심을 담아냈다. 때론 느릿하게 때론 격렬하게 변화하는 그의 변화무쌍한 노래들은 청자의 마음을 뒤흔들기에 충분히 매력적이다.

앨범을 주도하는 분위기는 분명 어둡고 진지한데 해학적 정서가 절묘하게 공존한다. 희망을 놓지 않겠다는 의미다. 리드미컬하고 신명나는 비트에 신명이 날 만하면 욕망의 공허함을 외치는 메시지가 여지없이 흥을 깬다. 그는 그냥 몸에서 쏟아져 나오는 데로 원 테이크 녹음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수록곡 중엔 취기가 느껴지는 노래도 있다. 이제껏 한국대중음악에서 이토록 기괴하고 독창적인 음악을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정차식은 '술, 담배로 목소리를 숙성시켰다'는 기괴한 보컬리스트 톰 웨이츠와 독특한 분위기의 백현진과 흔히 비견된다. 이들 모두 기괴하고 개성 넘치는 보컬리스트들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닮은꼴이다. 하지만 정차식은 아프리카 원주민의 필을 안겨주는 기괴한 흑인 뮤지션 스크리밍 제이 호킨스의 광기와 객기의 영향을 뼛속까지 전수받은 뮤지션이다. 무한 서정성의 대표주자 <시인과 촌장>도 그에게 가수의 꿈을 안겨준 국내 뮤지션이다.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뮤지션들의 상반된 정체성처럼 복잡 미묘한 정차식의 음악을 설명할 키워드는 '광기와 서정'이라는 극과 극을 내닫는 상반된 정서의 절묘한 공존에 있다.

앨범 타이틀 <황망한 사내>는 홀로 고된 밤샘 영화음악 작업을 하다 배가 고파 맥주를 사가지고 터벅터벅 걸어오다 "돈과 명예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음악을 하는 것도 아닌 현실이 서글퍼지면서 황망하다는 생각이 들어 정했다"고 한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주문음악에 매몰된 37살의 자신이 문뜩 초라하게 느껴졌던 것. 그가 앨범 속에서 그토록 용서를 빌고 있는 여인들과의 사랑이야기, 남자의 욕망과 야망의 정서 속에 녹아있는 DNA의 원형질은 어떤 환경에서 생성된 것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