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동유럽의 흔적이 투영된 도시

슬로바키아는 낯설면서도 고집스럽다. 변해버린 동유럽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소박한 도시들의 단면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슬로바키아 질리나는 북서부 접경을 가로지르는 말라 파트라 산맥 아래 자리한 외딴 도시다.

수도 브라티슬라바에서 북서쪽 질리나까지 야간 열차에 오른다. 쪽문이 난 여섯 칸짜리 좌석에 누우면 친숙한 시골정경 사이로 초승달이 동행이 된다. 달빛 아래로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검은 산들이 말라 파트라 산맥의 줄기다. 말라 파트라 산맥은 북서부 슬로바키아를 가로질러 500km 가량 뻗어 있다. 산맥을 경계로 질리나는 체코와 폴란드와 마주한 채 들어서 있다.

한국에 불어 닥친 체코 프라하의 열풍에 비하면 슬로바키아의 도시들은 고요하고 한가롭다. 질리나주의 주도인 질리나는 세 개의 강줄기가 에워싼 도시다. 바흐, 키쉬카, 라찬카 강은 도시 외곽을 감싸고 흐른다.

수백년 세월이 묻어나는 중세광장들

도시 질리나의 강성한 상징은 성 삼위일체 성당(The most holy trinity church)이다. 안드레이 홀린카 광장 한가운데 우뚝 선 성당은 13세기 옛 성곽이었던 곳에 세워져 600년 세월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인근 브리아노바 탑은 슬로바키아에서 가장 오래된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성 삼위일체 성당 뒤로는 마리엔스케 광장이 이어진다. 분수대가 어우러진 소담스런 마리엔스케 광장은 휴식을 부추기는 고즈넉한 공간이다. 광장에서는 슬로바키아 샌드위치인 ‘빠락’을 파는 포장마차들이 군데군데 들어서 있다. 질리나는 기아 자동차 공장 등이 진출해 있어 한국에 대해서는 친숙한 편이다.

고요한 도시의 단면 뒤에는 슬로바키아의 기구한 역사는 공존한다. 슬로바키아는 1000년의 세월 동안 헝가리의 통치를 받았다. 체코와 결합해 체코슬로바키아를 세운 뒤에도 경제 발전은 대부분 체코 중심으로 이뤄졌고 전통 농업 국가였던 슬로바키아는 늘 뒷전이었다. 뒤늦은 개발은 재분리된 슬로바키아가 오히려 옛 흔적을 유지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숲과 계곡의 하이킹 코스, 브라트나

질리나가 관광객들의 쉼터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인근 말라 파트라 국립공원과 브라트나 계곡 덕분이다. 거점도시 질리나를 관문으로 브라트나 일대는 사방이 울창한 아름다운 숲과 계곡으로 채워져 동유럽의 하이킹 코스로도 인기 높다. 도심에서 벗어나 이곳 펜션에서 하루 묵는 것은 트레킹 마니아들에게는 최고의 호사다. 경관은 스위스만큼 빼어나지만 물가와 북적임은 절반 정도다. 브라트나 인근은 겨울이면 스키리조트로도 변신한다.

질리나 등 외곽도시에서는 영어 등이 잘 통하지 않는다. 헝가리어, 체코어가 국어로 쓰이던 시절이 있었기에, 슬로바키아어를 제대로 쓸수 없었던 이곳 사람들의 자국어에 대한 애착심은 대단하다. 그 낯섦을 친절함으로 채운다. 슬라브족 여인들은 동양인들처럼 덩치도 아담하고 늘씬늘씬한 몸매를 자랑한다. 가족뿐 아니라 체면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정서도 흥미롭다. 유럽의 다른 관광지와 달리 때묻지 않고 상냥한 모습은 슬로바키아 여행의 또 다른 매력이기도 하다.

여행메모

▲가는 길=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를 경유해 질리나까지 이동한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출발할 경우 1시간이면 브라티슬라바까지 도착할 수 있다. 질리나까지의 이동 때는 2시간 가량 추가 소요된다.

▲음식=도심 노점상에서는 이곳 샌드위치인 ‘빠락’을 맛 볼 수 있다. 전통 닭 수프인 ‘슬레빠치아’ 역시 한국 사람들 입맛에 알맞다.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알칼리 맥주인 ‘필스너 우쿠엘’도 대중적이다.

▲기타정보=한국 기업들의 진출로 질리나에서는 여느 슬로바키아 지역과 달리 한인 민박집들이 들어서 있다. 슬로바키아어로 남자는 ‘MUZ’, 여자는 ‘ZENA’ 로 표기하니 화장실 이용때 참고할 것.

글ㆍ사진=서 진(여행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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