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팡 테리블을 깎고 다듬는 아방가르드 메카의 女帝젊은작가 발굴·지원한은 비영리 복합문화공간 이끌어

[감성 25시] 쌈지스페이스 김홍희 관장
앙팡 테리블을 깎고 다듬는 아방가르드 메카의 女帝
젊은작가 발굴·지원한은 비영리 복합문화공간 이끌어


시대와 호흡을 맞추며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 곳을 혹자는 ‘청년 미술의 산실’이라고 부른다. 순수 미술은 물론 언더 그라운드 음악, 무용, 독립 영화 등 각 분야의 실험적이고 진취적인 예술가들이 거쳐 나간 곳이다. 안정된 기업의 후원을 받고 있는 이 곳은 젊은 작가를 발굴하고 그들의 작업을 지원하는 비영리 복합 문화 공간 ‘쌈지 스페이스’다.

“오아시스 프로젝트의 예술 포장 마차가 로비에서 영업을 하니까 꼭 들렀다 가세요.” 김홍희 관장이 넉넉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전시 기간 중에 포장 마차 영업을 한다고? 이색적인 전시임엔 틀림 없다. 쌈지스페이스의 창작 스튜디오 프로그램인 ‘오픈 스튜디오’ 전을 말하는 것이다.

일년 작업하고 일주일 간 전시하는 이 자리는 작가들에게 쌈지스페이스를 졸업하는 의미의 ‘졸업 작품전’인 셈이다. 전시 기간이 지나면 그들이 기증하는 작품들은 쌈지 컬렉션의 기초가 되기도 한다. 오프닝으로 쌈지스페이스 2층 미디어 시어터 ‘바람’ 공연장에서는 한젬마의 퍼포먼스 ‘하나 되기’가 관객들이 참여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3기 쌈지스페이스 작가 김지현의 탱고 공연은 무도회장에 온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다 함께 탱고를 차차차, 서로 어울리는 분위기.

언더정신으로 탈장르 추구
쌈지스페이스는 어느 날 불쑥 생긴 듯 했지만 홍대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문화에 서서히 융화되어 갔다. “아방가르드의 메카를 꿈꾼다.” 5년 전 암사동 창작 스튜디오에서 홍대 앞으로 이전했을 때 김홍희 관장이 처음 했던 말이다. 개관 기념으로 포스트모던한 신세대 작가들을 초대해 ‘무서운 아이들…1990…2000’ 전을 열어 ‘젊은이의 거리’라 불리는 ‘홍대앞’ 에서 신고식을 치르기도 했다. 그 때 참여한 작가들은 이불, 이형주, 안상수, 고낙범, 홍성민, 이용백, 이동기 등 전시 제목처럼 미술계의 ‘무서운 아이들’이었다.

“아방가르드 예술과 일상 생활의 접목을 추구하고 실험적이고 진취적인 예술가들을 지원하겠다”고 쌈지 스페이스가 추구하는 입장을 분명히 밝힌 김홍희 관장. 그 후에 쌈지 스페이스는 언더그라운드 정신과 탈장르의 추구라는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전시를 기획해 왔다.

홍대 앞 대안 공간 중 기업의 후원을 받는 쌈지 스페이스. 발굴한 신인에게 등단의 기회를 마련해 주는 ‘이머징’전, 제자와 함께 전시하는 그룹전인 ‘Pick & Pick’ 전, 기획부터가 도발적인 원로와 신인을 한 무대에 올려 맞짱 뜨게 하는 방식인 ‘타이틀 매치’ 전, 한국과 외국의 젊은 작가들에게 상호 소통의 기회를 마련하여 만남의 경험을 작업과 전시로 옮기는 ‘국제 교류’전 등은 한국 작가들을 해외로 진출시키는 등용문이기도 하다. 다양한 전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쌈지 스페이스는 다른 미술관과는 다른 독특한 개성이 있다.

쌈지스페이스의 전략은 관장 김홍희와 닮았다. 안정적이지만 보수를 지지하진 않는다. 기업의 후원을 받지만 상업적이지만은 않다. 실험적이고 예술적 끼가 보이지만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검증되지 않으면 반영하지 않는 엄격함이 있다.

딱딱해 보이는 검은색 정장 차림에 튀는 스카프나 구두로 은근히 멋을 낸 스타일이 눈에 띤다. 까만색 단발머리에 연두색 똑딱이 핀 브릿지가 유독 튀어 보인다. “요즘 김홍희 패션이예요”라고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는다. 브릿지 색은 요일마다 칼라가 바뀐다. 해외 유명 인사들 사이에선 칼라플한 브릿지만 보고도 “김홍희다” 할 정도다. “제가 은근히 튀는 것을 좋아해요. 펑키 클래식이 제 패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죠.” 그녀의 클래식한 면에서 종종 펑키함이 노출되듯, 반대로 펑키함에서 클래식이 유지되듯, 쌈지 스페이스의 현재 진행형 스타일을 말해주는 것 같다.

김홍희, 그녀는 1892년 백남준을 국내에 소개하는 저서 ‘백꼰莫?그의 예술’을 발표하면서 전시 기획자와 미술 평론가로 국내 미술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뒤늦은 출발이었지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로 활동할 정도로 누구보다 빠른 성장을 해 왔다. “미술을 공부하면서 더 이상 방황을 하지 않았어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뒤늦게 알게 된 거지요.”

인생을 바꾸어놓는 미술사 공부
서른이 넘어 시작한 미술사 공부는 그녀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미술을 접하기 전 그녀는 정서적으로 센티멘탈했지만 그것을 표현할 길을 찾지 못하고 정체성 찾기에 골몰했다. 결혼 후에 오히려 사춘기 마냥 방황한 그녀는 “나는 뒤늦게 철이 든 경우”라고 솔직하게 말한다.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그녀는 인사동을 찾곤 했다. 골동품을 수집하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 국악원에 들어가 가야금을 배우기도 했다. 그렇게 정서적인 목마름을 달랬다.

그러던 중 그녀에게 제 2의 인생이 열렸다. 남편(천호선)이 주미 한국 문화원의 문정관으로 발령이 나면서부터다. 뉴욕 체험은 그녀에게 문화 충격을 안겨 주었다. 1980년도였다. 뉴욕의 현대미술관에 가면 그녀는 애가 타곤 했다. 모르는 그림이 너무 많다는 것은 그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고, 지적 욕구를 불러 일으켰다. 그 후 뒤늦게 미술학도가 되어 미술사를 공부했지만 지적인 목마름과 현장감의 부족은 공부를 하면 할수록 폭이 깊어지기만 했다.

그 때 뉴욕 아방가르드의 대안 공간인 ‘키친’에서 백남준 선생을 처음 보았다. “적지 않은 문화적 충격을 받았죠. 바이올린과 LP판을 깨는 해프닝이 벌어졌는데 소름이 끼쳤어요.” 그녀는 백남준 선생이 깨부순 판 조각을 하나도 빠짐 없이 주워 그에게 다가갔다. 백남준 선생을 비롯한 플럭서스 멤버와 같은 아방가르드 예술인들은 정부 기관 사람들을 백안시 하던 때였다. 하지만 그는 “깨 부순 조각이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 며 대수롭지 않게 싸인을 해 주더란다. 그녀는 미국에 머물고 있던 아방가르드 예술인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백남준과의 인연도 그 때부터다.

“오랜 미국 생활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많은 것들에 부딪히게 되었죠. 한국에 정착하는데 알게 모르게 도와준 분이 백남준 선생님이죠.” 그녀는 백남준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국내 미술계에 확고한 자리매김을 했다. 백남준은 그녀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쌈지 스페이스가 아방가르드의 산실을 꿈꾸는 이유이기도 하다.

페미니스트 미술 전문가
그녀는 페미니스트 미술 전문가이기도 하다. 미술사에서 소외된 여성 미술을 집중 조명한 저서를 발표했던 그녀. “가정 생활이나 결혼에서 느낀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라 사회에서 느꼈던 가부장적 젠더의 모순을 미술과 접목시켜 고찰한 작업이예요.” 사회에 뿌리 깊이 내재된 가부장제의 모순, 그 때문에 자신은 물론 많은 여성 미술인들이 사회에서 소외되어 왔음을 깨달았다. 극복하는 과정에서 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 진정성을 찾았다며 경험담을 풀어 놓기도 한다.

그녀를 말할 때 쌈지길 대표인 남편 천호선 씨와의 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 남편의 지지와 격려 또한 그녀에게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했다. 이제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지인 그들은 집에서 헤어지자마자 핸드폰을 붙들고 소소한 일상을 수다로 전하는 아직 대학생 같은 조금 이상한(?) 부부다. 어디를 가든 늘 붙어 다녀 사람들은 그런 김홍희를 “천홍희” 라 부른다고 하는데. 오른손엔 쌈지 작가가 만든 수공예 반지를 끼고 왼손가락을 들어 “우리 커플링이예요.”

자랑하는 그녀를 보니 샹송을 좋아해 불문과를 갔다는 소녀 시절 김홍희가 떠오른다. 아니 그보다 까만 단발 머리에 연두색 브릿지를 넣은 헤어 스타일이 1960년대 대학 시절 미니스커트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던 여대생이, 약혼식 때 미니스커트를 입겠다고 고집했던 다리가 이뻤던 어린 신부가, 한 여자 김홍희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그녀 김홍희, 현재 쌈지 스페이스의 리더다.

유혜성 객원기자


입력시간 : 2005-04-06 18:39


유혜성 객원기자 cometyou@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