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평림·원춘일·엄나익씨의 젊은이 못지 않은 빛나는 노익장

‘연말 술상에는 안주가 필요 없다.’ 한 해를 마무리 짓고 내년을 설계하는 술자리인 만큼 화제가 무궁무진하다. 굳이 안주를 따로 시킬 필요가 없다.

그런데 어느 해이건 간에 빠지지 않는 ‘안주감’이 있다. 바로 ‘나이’ 이야기다. 며칠 뒤면 한 살 더 늘어날 나이에 세월의 무상함과 시간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는 자리가 된다는 얘기다.

더러는 한 살 더 먹는다는 사실에 즐거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다수는 그 반대다. 이 때쯤 자연스럽게 나오는 얘기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서로서로를 위로해 보지만 신통치 않다. 즐거워야 할 송구영신의 술자리에서 고개 떨구고 있을 사람들을 위해 다음 세 사람을 소개한다. ‘나이는 숫자다’라는 말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고졸 검정고시 최고령 합격, 75세 나이 무색한 향학열

처음 만난 사람은 신평림씨. 내년에 76세가 되는 늦깎이 학생이다. 현재 서울 마포구 대흥동의 양원주부학교 교양부 2학년에 재학 중인 신씨는 2003년 고등학교 입학 자격검정고시와 2년 뒤인 2005년 고등학교 졸업 자격검정고시에 모두 전국 최고령으로 합격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주인공이다.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은 없다.” 고승덕 변호사가 낸 동명의 책이 나오기 전부터 그 말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는 그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무슨 일을 시작하는 데 주저하거나 시작한 일을 중도에 포기하면서 나이를 핑계로 삼는 사람들이란다.

“오늘의 영광은 중도에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물론 나이가 많으면 한 번 배운 것도 뒤돌아서면 까먹고 또 까먹고 하지만, 그게 사람의 열정을 막을 수는 없어요.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하면 안 되는 일이 없지요.”

신씨는 전남 영암에서 4남2녀 중 셋째로 태어나 하마터면 초등학교 문턱도 넘지 못할 뻔했다. 딸들은 당연히 집안 일을 돌보다 시집가면 된다고 여기던 시절이었고 신씨의 아버지도 예외가 아니었던 탓이었다.

신평림씨

‘지게꾼 사위’는 맞기 싫다는 신씨 어머니에 이끌려 들어간 학교(영암 신북 초등학교)는 광복이 되던 해 봄에 가까스로 마칠 수 있었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에 더 이상의 공부는 무리였다.

이후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1남6녀를 키워내고 몇몇 손자들까지 길러낸 신씨는 50년 동안 책을 다시 펼쳐 든다는 일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1998년까지 12년 동안 완구 공장에 다녔는데, 오가는 길에 영어로 된 간판만 보면 읽고 싶어 안달이 났습니다.” 달리 배울 길을 알지 못해 마음에만 두고 있던 그는 딸한테서 나이에 상관없이 공부를 할 수 있는 학교 얘기를 듣는다.

“그날 잠이 안 왔습니다. 자는 둥 마는 둥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학교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당시 딱 내 나이(72)까지의 학생들을 전화한 그 날까지만 받아준다고 하더라고요. 뒤에 알았지만 나이도 날짜도 모두 어떤 선생님이 한 거짓말이었는데, 그 거짓말 덕분에 광명에서 한 달음에 달려와 입학신청서를 낼 수 있었습니다.”

나이를 많이 먹은 탓도 있었겠지만 신씨에게 힘들면서도 가장 재미있는 과목은 영어였다. “공부하고 돌아서면 잊어먹는데 참 막막하더라고요. 공부할 검정고시 준비할 때에는 새벽 2시 이전에 잠자리에 든 적이 없었습니다.”

수학은 공식에 맞춰 응용하면 문제가 풀려 그나마 나았다. 영어가 재미있긴 하지만 어려워서 전공으로 삼기에는 벅찰 것 같았다.

이 때문에 영어 때문에 입학한 학교였지만 정작 신씨가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은 과목은 한문이다. 황진이의 시 ‘청산리 벽계수…’를 뽑아 보이며 한문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는 그의 꿈은 노인복지관에서 한문을 가르치는 것이다.

앞서 양원주부학교의 최고 과정을 끝낸 신씨는 날씨가 추워지면서 가족들의 조언에 따라 학교를 그만 둘까도 생각했다.

그렇지만, 평소 학교에서 왕언니로 불리며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던 신씨를 학급 반장 경복자(47)씨를 비롯한 동료 학생들이 내버려두지 않았다.

원춘일씨

“우리 학생들의 귀감이나 다름없는 언닌데 우리가 조르고 졸랐죠. 남아서 계속 공부하시라고.” 고졸학력검정고시까지 통과한 마당에 신씨가 교양부에 재학중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학교 수업 외에도 동네 주민자치센터가 주관하고 있는 인터넷 강좌에 흠뻑 빠져있다. “요즘 인터넷 못하면 아무것도 못한다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배웠는데 참 재미있어요. 지금은 메일 주고 받는 거 배우는 중인데 배우면 이 명함에 적힌 주소로 한 통 보내겠습니다.”

일흔 다섯의 공부하는 할머니는 열 다섯의 소녀와 다름 없었다.

못말리는 일흔일곱의 건각 하루 2시간 이상 30년 달려

다음에 만난 사람도 젊은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인물이다. 12월 초에 열렸던 2005 한국일보 릴레리 마라톤 대회(구파발-임진각 37.4㎞)에 참가한 원춘일(78)씨다.

원씨의 하루는 새벽 3시에 시작된다. 바로 이 시간부터 그가 ‘달리기’ 때문이다.

“보통 밤 11시 정도에 잠들고 3시에 일어나 2시간씩 달리고 있습니다. 코스는 그날 그날 다르지만, 광명시가지 한 바퀴, 안양천 등지를 달리는데, 눈이나 비가 내려 달리지 못하는 날을 제외하고 거의 30년 동안 그렇게 달렸습니다.”

광명육상연합회 소속의 원씨는 이 대회에 출전한 최고령 선수로 완주한 하프 마라톤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고 춘천마라톤 등 풀코스 대회만도 일곱 번을 완주한 기록 보유자다.

그간 받아 모은 메달, 트로피, 상패만도 100개가 넘을 정도. 여든을 코 앞에 둔 나이에도 불구하고 병원신세 한 번 져 본 적이 없을 정도의 건강도 덤으로 얻었다.

“건강도 건강이지만, 달리기는 자신과의 싸움인데, 여기서 이기는 사람은 못할 일이 없게 됩니다.” 그 덕분인지 그는 환갑의 나이인 18년전에 지금의 직장(종로계기산업 물류관리)에 취직했다.

이런 그를 직장 동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한 동료 여직원은 “전철로 같이 퇴근 하는 길이면 아저씨가 서고, 제가 앉아서 갈 정도”라며 직원들 중에 적어도 ‘할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엄나익씨

최소한 ‘아저씨’로 통한다는 얘기. 실제로 원씨도 경로당, 노인정에서 시간을 보내는 대신 달리기로 시간을 보낸 탓에 젊은 사람들과도 어울려 되려 젊어진 것 같다며 희색을 감추지 못했다.

원씨가 가장 경계하는 류의 사람들도 앞서 소개된 신평림씨와 별반 다르지 않다. “젊은 사람들이 운동의 필요성을 알면서도 시간이 부족하다며 운동을 미루고, 또 쉰도 안된 사람들이 겁 먼저 먹고 운동을 미루는 데 참 보기가 안됐어요.

시간 나면 하는 게 운동이 아닙니다. 시간을 내서, 시간을 만들어서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해야죠.”

이른 새벽에 달린 탓에 이 같은 그의 ‘30년 행각’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동네서는 지금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겁니다. 직장 동료들도 한참동안 모르고 있다가, 계단을 뛰어다니고 버스나 전철에서도 웬만해서는 앉지 않으니까 이를 이상하게 여긴 동료들이 알아차리기 시작한 겁니다.”

달리면 상념들이 날아가고 마음을 깨끗하게 비울 수 있어 하루하루를 새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어 좋다는 원춘일씨. 그는 시간을 거슬러 달리고 있었다.

음악이 있어 행복한 삶 "연주하는 동안 시계도 멈춰"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올해 78세의 엄낙익씨. 서울 송파구청 소속의 실버악단 단장이다. 실버악단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만 55세 이상의 멤버들로 구성된 악단이다.

이 악단의 ‘막내’는 64세, 전체 열 다섯 단원들의 평균 연령은 72세에 달한다. 방송국 악단 등을 이끈 바 있는 엄 단장을 비롯 군악대, 밤무대 등에서 다양하고 화려한 이력을 쌓은 악사들로 구성된 이 악단은 오는 1월이면 창단 만 12년이 된다.

실버악단은 송파구 소속의 악단이되, 서울시는 물론 전국 지자체로부터 초청 받고 있다. 최근에는 상하이, 오사카 등지의 외국 도시에서도 초청 받을 정도로 높은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화요일과 금요일 일주일에 두 번씩 모여 한번에 2~3시간씩 연습을 하고는 있지만, 이마저도 초청 행사 때문에 지키지 못할 때가 많다.

“연주하지 못하는 곡이 없습니다. 세 살 먹은 아이들의 노래서부터 여든 살 노인들의 노래까지, 그리고 30~40년대 곡에서부터 최신 유행가까지 거의 모든 곡을 소화합니다.”

드럼, 베이스기타, 리더기타, 전자오르간, 트럼펫, 트럼본, 색소폰 등의 악기로 구성된 악단은 공식 공연 외에도 여러 행사에서 수반되는 행사음악까지 소화해낸다. 레퍼토리만도 1,000곡이 넘는다.

쇄도하는 초청공연에도 불구하고 실버악단이 12년 동안 한결같이 지키고 있는 공연이 있다. 매년 12월23일 서울 잠실역 지하 분수대에서 구세군 자선냄비를 곁에 두고 벌이는 자선 공연이다. 물론 올해도 그날 그곳에 가면 그들을 만나볼 수 있다.

“좋아서 하는 음악이지만, 연주하는 동안 우리는 늙지 않습니다. 우리 시계는 멈춰버리죠.”


정민승 기자 msj@hk.co.kr